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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당선작] 낙산사 불보살님이 홀로 서고 걷고 싶은 꿈을 이뤄주셨어요

기자명 법보

포교사단장상 -어경희

42세에 하반신 마비…아들 제안으로 처음 사찰을 찾고
10시간 수술‧6개월 재활 후 기도하며 조금씩 걷게 돼
낙산사 마을로 이사해 금곡 스님에 감동‧불법전파 다짐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부처님 터전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부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낙산사에 계시는 관세음보살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어디에선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힘겹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내 나이 겨우 42세에 하반신 마비가 오기 시작해서 44세에는 혼자 일어서고 눕고 걷기도 힘들고 차를 타기도 힘들었다. 두 아들 교복을 다리미로 다려 깔끔하게 해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다림질을 할 수가 없었다. 엎드려서 해도 안 되고 서서 할 수도 없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 고3때였다. 한 달에 한번 마지막 일요일이 쉬는 날이어서 겨우 작은 아들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밥을 했다. 큰아들은 자고 싶다고 하는데 작은 아들이 “형아 밥 먹어, 새 밥이야”라고 하는데 저절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두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도 제대로 못해주는 엄마였던 것이다.

두 아들이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도 종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서 작은 아들이 속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한테도 기도할 수 없고, 부처님한테도 기도할 수 없으니, 조상님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건강해서 차도 태워주고 따뜻한 밥도 해주면 좋겠다”고 혼자 기도를 한다는 것이었다. 아들 말에 또다시 울컥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럼 우리도 종교를 갖자고 했더니 두 아들이 너무나 좋아했다. 

그럼 어느 종교를 가지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와 큰엄마처럼 우리도 부처님을 믿고 싶다고 해서 처음으로 부처님을 찾게 됐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집에서 가까운 경포에 있는 인월사였다. 절에 처음 찾아간 날 어머니처럼 자상하신 비구니 스님 두 분께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후배가 날마다 집으로 와서 혼자는 걷지도 못하는 나를 데리고 인월사를 찾았다. 절에 가서는 부처님 앞에서 그저 울기만 했다. 큰아들이 수능시험을 보는 날, 시험지를 앞에 놓고 앉으니 집에서 누워있는 엄마 얼굴만 가득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도 미안했다.

그래도 목표에 미치진 못했지만 큰아들을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보내놓고, 작은 아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술을 받으러 서울로 갔다. 척추 뼈 4개가 삭아서 인공뼈를 넣어야 하는 힘든 수술이었다. 

수술을 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날 어머니가 다니시는 대관령 아래에 있는 보현사 부처님을 찾아 갔다. 남편은 나를 안아서 뒷자리에 눕혀놓고 두 아들을 데리고 법당에 가서 기도하고 내려왔다.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을 했다. 걷지를 못하다 보니 앉아서 손으로 땅을 짚고 다녀야 했다. 수술을 해도 성공 확률은 50% 정도였다. 하지만 그 50%의 성공 확률을 기대하면서 10시간 동안의 힘든 수술을 했다. 마취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환자실이었다. 

나 하나의 삶에 대한 애착은 없었다.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부처님께도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부처님께서 들어주셨다. 재활기간 6개월 동안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목 밑에서 엉덩이까지 보조기를 하고 로봇처럼 걸을 수 있게 됐다. 보통사람들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을지라도, 보조기에 의지해서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처님 가피였다. 

그렇게 부처님 가피에 감사하며 생활하던 어느 날 작은 아들이 드릴 말씀이 있다며 마주 앉아서는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수술하러 가시던 날 부처님 앞에서 맹세를 했어요. 부처님 우리 엄마 수술 잘 되어서 걸을 수 있게 되면, 부처님 제자는 될 수 없어도 부처님을 믿는 불자가 될 것을 부처님께 약속드립니다.”

아들의 말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바로 아들의 그 기도가 부처님께 전해진 것 같아 더없이 행복하고 뿌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혼자서 겨우 걸을 수 있을 때 쯤, 안타깝게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앞에 엎드려 절을 할 수 없어서 그저 서서 울기만 했었다. 겨우 친정어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와서 날마다 인월사를 찾아 부처님 앞에서 기도했고, 경포 호수를 걸으면서 운동을 했다. 매일매일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면서 하루하루가 더없이 행복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과 나의 기도를 부처님께서 들어주신 가피로 보조기 없이도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보조기 없이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행복해 하던 어느 날, 일산에 사는 여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생은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를 잊지 못해 날마다 울면서 꿈에라도 오시라고 기도를 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로 집에 어머니가 오셨는데, 그 다음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방과 방은 물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어머니가 따라 다니셔서 도저히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며 하소연을 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는 혹시 동생에게 이상이 생겼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일산 동생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날 밤, 동생 손을 잡고 자려고 누웠는데 정말로 어머니의 기운이 느껴지면서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 스님께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와 관련한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천도재를 지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하셨다. 그렇게 해서 정성스레 마음을 다해 천도재를 지내드리고 나서 동생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동생의 꿈속에서 어머니가 선녀 옷을 곱게 입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나서는 어머니가 집에서 떠나셨다는 것이다. 이 또한 부처님 가피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2001년, 우연히 찾았던 낙산사가 너무 좋아서 부처님 터전으로 이사를 했다. 아들이 뒤에서 조심조심 밀어주면서 낙산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앉지도 서지도 걷지도 못하던 지난날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상을 보내면서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했다. 

그런데 2005년 4월5일, 양양지역에 큰 산불이 나면서 낙산사에도 화마가 덮쳤다. 그렇게 아름답던 곳이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도 신기하게 불상이 모셔져 있는 법당만은 화마가 피해 가는 걸 직접 보았다. 부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다는 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우리는 전 재산이 쌓여있는 건어물 가게를 두고 피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봉정암에서 낙산사로 오신 주지 금곡 스님께서 “재산은 서천에 구름이니, 천재를 어찌 이기려 하느냐”면서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그날 상가사람들을 밖으로 피신하도록 이끈 분이 바로 낙산사 주지 금곡 스님이셨다. 큰 화재로 사찰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상가 사람들의 안위까지 생각하는 금곡 스님의 따뜻한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손길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날마다 낙산사에 올라가서 울었다. 사월 초파일. 금곡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고맙고 감사해서 또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무가 없으니 꽃이 없고, 꽃이 없으니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도 없지만 다시 예전에 아름다웠던 모습을 만들겠다”고 하시면서 모든 불자들의 꿈을 반드시 이루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꿈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도 낙산사는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낙산사 인근으로 이사 와서 큰 수술을 두 번 더 했지만, 부처님 터전에 온 이후로는 수술하러 가면서도 두려움이 없어졌다. 부처님께서 돌봐주신다고 생각하니 수술도 잘 됐다. 나는 수술을 할 때 수혈거부 반응으로 인해 수혈을 받을 수 없어서 자가수혈을 해야만 했다. 1주일에 한 번씩 서울로 가서 수혈을 해서 보관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신장결석 수술을 준비하느라 백중기도를 깜박 잊고 수술을 하게 되었었다. 그때 중환자실에서 꿈을 꾸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친정어머니가 배가 고파 밥을 훔치다 들켜서 맞는 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중기도 입재를 못한 것이 생각나, 아들에게 부탁해 낙산사에 전화해서 백중기도 입재를 하게 했다. 그렇게 기도 입재를 하고 일반병실로 옮긴 다음 꿈속에서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시면서 옥색 한복을 입으시고 손을 흔들면서 가셨다. 기도를 많이 못하는 내게도 부처님은 그렇게 많은 가피를 주셨다.

복은 지은만큼 받는 거라고 금곡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나로 인해 속상한 사람 없고 나로 인해 한사람이라도 행복 할 수 있도록, 부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자신과 약속을 했다. 

지난 가을 남편이 뇌졸중 진단을 받았을 때도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남편을 입원시켜놓고 홍련암에서 관세음보살님께 울면서 기도했다. 남편이 건강하게 퇴원을 하게 된 것도 역시 부처님 가피라 생각한다. 사실 나는 4년 전부터 한쪽 눈을 못 보게 되었다. 망막중심정맥폐쇠. 사물이 깨지고 알아볼 수가 없고 오른쪽 한눈으로 앞을 보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남편과 두 아들 며느리 손주가 건강할 수 있음에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금곡 스님을 존경한다. 낙산사 주차장에서 살고 있는 원각행은 오늘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주변에 전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한다. 나무관세음보살!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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