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기가 그곳-봉림산문 봉림사지

기자명 이창윤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대숲에 묻힌 봉림가문(鳳林家門) 사자후

심희 스님이 김해 호족 도움 받아 창건
여주 이씨 묘 쓴 후 폐사…성보 외지 반출

창원시는 불연(佛緣)이 깊은 고장이다. 가야 수로왕의 비인 허황옥의 아들 10명중 7명이 수도해 성불했다는 불모산(佛母山)이 있고, 그 기슭에는 성주산문의 개조 무염(無染) 스님이 신통력으로 왜적을 무찌른 것을 보답하기 위해 왕이 지어주었다는 성주사(聖住寺, 성주산문의 본산인 성주사는 충남 보령시에 있음)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사(鳳林寺)의 옛터가 절 이름을 딴 봉림동에 자리하고 있다. 창원은 그래서 한국불교 태동의 현장이자 신라 선불교의 화려한 꽃을 피운 개화지이다.

용성 진종(龍城 震鍾) 스님이 제자들에게 불교 초전지 복원을 부촉하면서 가야 불교 초전지로 봉림사지를 지목한 것도 그 탓인지 모르겠다.

봉림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다른 구산선문을 찾아가는 길과는 느낌부터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산문들이 한적한 시골길을 한참이나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외진 곳에 있지만 봉림 사지는 창원이라는 대도시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봉림사지가 있는 봉림산에 들어서면 이곳이 창원인가 싶을 정도다. 산에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수많은 차량이 질주하는 시가지가 들어서 있지만, 봉림산 골짜기는 한적하다 못해 소슬하기까지 하다. 290m에 불과한 높지 않은 산이지만 계곡이 깊은데다, 계곡 입구에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탓이다. 마을 뒷편으로 난 농로를 따라 산으로 오르자 이내 고만고만한 계단식 논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계곡을 따라 난 오솔길을 따라 오르길 10여 분. 눈 앞에 느닷없이 넓은 분지가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1,000여 년전 진경 심희(眞鏡 審希) 스님이 눈푸른 운수납자들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 내던 봉림사의 옛터다.

봉림산문을 개창한 심희 스님은 원감 현욱(圓鑑 玄昱) 스님의 제자다. 현욱 스님은 헌덕왕 16년(824)에 당나라에 건너가 마조 도일 스님의 법손 장경 회휘(章敬懷暉) 스님의 법을 이은 분이다. 현욱 스님은 귀국해 실상사에 머물며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등의 귀의를 받았는데, 문성왕과 경문왕의 청에 따라 지금의 고달사(高達寺, 경기도 여주에 터가 남아있다)에 주석했다.

스승인 현욱 스님과 제자인 심희 스님의 법연(法緣)은 고달사에서 맺어진다. 심희 스님은 9살 때 고달사를 찾아 현욱 스님에게 출가했다. 심희 스님은 14살 되던경문왕 8년(868)에 열반을 앞둔 현욱 스님으로부터 "너에게 마음의 등불을 전하니 내가 부촉한 것을 법신(法信)으로 삼으라"(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는 당부와 함께 심인을 전해 받는다.

19살 때 고달사를 떠나 송계선원(松溪禪院, 위치는 정확치 않다. 지관 스님은 전남 강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과 명주에서 머물다 김해 지방의 호족 김인광과 김율희의 도움으로 봉림산문을 열어 스승의 선풍을 널리 펼친다. 이 때가 신라 효공왕 5년(901)의 일이다.

봉림산문은 심희 스님의 뒤를 이은 고달사의 원종 찬유(元宗 粲幽) 스님, 경청선원의 자적 홍준(慈寂 洪俊)·흥법사의 진공 충담(眞空 忠湛) 스님 등에 의해 계승돼 갔다.

심희 스님의 주석 이후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선찰로 법등을 밝혔던 봉림사는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창건 이후 중창이나 중수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다만 폐사와 관련된 서글픈 전설만이 남아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전의 일이다. 이언적의 후손인 여주 이씨들이 밀양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봉림사 자리가 명당임을 알고 묘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스님들이 완강히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친이 죽자 여주 이씨들은 시신이 들어있지 않은 상여 세 대를 만들어 스님들을 유인하고 그 틈을 타 봉림사에 묘를 썼다. 그 뒤 절은 폐사되고 여주 이씨 가문 또한 망했다고 한다. 전설에 언급된 묘인지는 알 길 없지만, 망부석까지 세워진 제법 규모가 큰 분묘가 봉림사지 동쪽기슭에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불교사의 한 장을 열었던 봉림사지이지만 지금은 억새와 대숲만 무성할 뿐옛 영화는 찾아볼 수 없다. 일제가 심희 스님의 묘탑인 '보월능공탑(寶月凌空塔)'을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묘탑이 있었던 자리임을 표시해 두기 위해 세운 입석과 사지 여기저기 널린 기와와 자기 조각, 추춧돌 몇 개만이 봉림사의 옛터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창원 = 이창윤 기자

※답사 정보

성보
봉림사지에는 진경대사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과 능공탑비(보물 제363호),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제26호) 등이 있었지만 모두 외부로 반출됐다. 보월능공탑과 탑비는 서울 경복궁에 있다. 모두 1919년 반출됐다. 보월능공탑은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이지만 표면의 장엄 조각이 적어 청초한 감을 준다. 신라양식에서 고려양식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부도다. 탑비는 형식화된 통일신라 후기의 조각 양식을 보여준다.

삼층석탑은 창원시 지귀동 상북초등학교에 있다. 일제시대 때 부산으로 반출됐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관리소홀로 파손이 심해져 창원교육청에서 1960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구성양식이나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찾아가는 길

창원시 명곡로에서 봉림로를 따라 진행하다 보면 봉곡삼거리, 지귀상가삼거리를 지나 창원컨트리클럽과 보현선원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창원컨트리클럽으로 가다 보면 주택가를 지나 곧 길 오른쪽으로 농촌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 뒤산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계단식 논이 나타나는 곳에서 논을 지나 계곡을 건너는 오솔길이 보인다. 이 오솔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면 봉림사지이다. 봉림사지 바로 못미처 작은 과수원이 있다.
삼층석탑이 있는 창원시 상북초등학교는 봉림로에서 봉림동사무소 이정표를 따라 진행하다 보면 길 왼쪽에 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