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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의 졸속 행정

조선왕조 세종 때 조세제도 하나 바꾸는 데 25년이 걸린 일이 있었다. 세종의 뜻으로 시작된 일이었는데 중요한 사안이었던 만큼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고 과거시험의 제목으로 출제를 하여 좋은 견해도 찾고, 17만이나 되는 신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도 하였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고치고 보완하여 시행을 하는데 그런 긴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절대왕정이라 할 수 있는 당시, 임금의 뜻인데도 그것을 고치는데 이렇게 신중하였던 역사를 보면 지금 정권의 졸속한 행정을 새삼 아프게 느끼게 된다. 

정책과 제도는 한번 결정되면 국민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혹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치는 과정 또한 매우 어렵고, 고쳐지기까지 엄청난 국력 손실과 국민의 아픔이 있게 된다. 그렇기에 정말 돌다리 두드리듯 조심스럽게 결정하고, 한 번 결정하면 쉽게 바꿔서는 안 된다. 쉽게 바꿀 수 있다고 하면 결정 또한 가볍게 된다. 그 가벼움이 다시 문제를 낳고, 그것을 쉽게 고치려 하면 더 큰 문제를 낳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그런데 지금 정권이 정책을 결정하고 제도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 꼭 위에 말한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정권의 도덕성이라든가, 정권의 근본 지향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이 정권이 진보적 이념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를 부양해 자본주의 문제점인 극심한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그런 지향에서 나왔다는 정책과 제도가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가를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정권의 근본 지향과 기본적 도덕성 자체가 의심을 받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원인은 졸속성과 경박함에 있다고 생각된다. 

“책상에서 펜대를 굴린다”는 말처럼,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겠지?”하고 쉽게 어떤 정책과 제도를 급조해 내놓는 듯한 느낌이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요인들이 얼마나 다중적인가, 그 다중적인 요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 것인가에 대한 치밀한 고찰과 시뮬레이션이 없다. 단적으로 말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얼마나 영악하고도 재빠르게 이익추구를 위해 움직여나가는가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시간강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급조해내니 시간강사의 밥줄을 끊는 결과를 낳는다.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제도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아픔을 겪게 만든다. 결정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억제한다는 부동산 정책은 완전히 거꾸로의 결과가 되어, 국민 앞에 부끄러운 사과를 해야만 하는 참담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결단코 부동산을 안정시키겠다고, 몇십만 호를 짓겠다는 등 대책을 발표하는 모습이 더더욱 정책의 입안과 시행의 경박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대책은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어져 온 것인가? 이렇게 참담한 실패를 낳기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면 당연히 이 실패를 거울삼아 그 계획을 다시 검토하고 수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짧은 시간 안에  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검토 없이 “다음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라고 발표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런 것도 아니고, 실패 뒤에 급히 만든 계획이라면 그건 더더욱 심각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책이 불쑥 나올 때마다 겁부터 내야할 판이다.

요즈음 모든 이들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LH 투기 문제는 이런 경박한 정책과 제도가 불러온 말단적인 문제일 뿐이다. 좀 늦더라도 차분하게 제도를 마련하고 정책을 시행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한 엄정한 처리는 정권의 도덕성을 걸고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경박하고도 졸속한 정책이 계속되면 끊임없이 이런 사건이 이어진다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사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다. 좀 더디더라도 본디 목적했던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단단하고도 치밀한 정책을 펴나가는 일, 이것이 근본이다.

성태용 건국대 명예교수 tysung@hanmail.net

[1577호 / 2021년 3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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