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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종 원로의장 진파 스님

“일체중생 다 건지겠다는 그 마음이 행복으로 이끕니다”

평생 중생 행복 이끈 부처님처럼 산다면 행복은 곧 찾아와
불교공부 매진하면 불행 저절로 없어지고 어리석음도 멸해
지극한 마음으로 사홍서원 실천하면 세상은 곧 낙원 될 것

부산 용수사에서 ‘법화경’ 사경 수행을 권장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용수사 신도들은 가난과 싸워야 하는 서민들이고, 한글을 모르는 연세 많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IMF가 터져 모진 시련을 겪고 오신 분들이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신도들과 함께 공부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제가 하는 공부는 ‘능엄경’을 바탕으로 합니다. ‘능엄경’을 공부하기 위해서 능엄신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능엄경’을 공부한 것은 ‘법화경’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능엄경’과 ‘법화경’ 다 마찬가지입니다. 경전 말씀을 믿고 공부해보니까 정말 맞습니다. 

부처님 법은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건성으로 신행활동을 한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와 부처님 공부를 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보다 영리하고 복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공부한다면 저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겠는데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의 말을 하고 사람의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똑같이 겪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해야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벗어나게 됩니까?”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사는 모습을 한 가지라도 반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행복할 수 있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부처님입니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에서 벗어난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이상 행복한 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생각을 하면 제일 좋은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 ‘부처님’ 하는 말이 제일 좋은 말입니다. 부처님을 부르고 절을 하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빨리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믿는 것보다 더 빨리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오셨는가 생각해봅시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스승이 되어 찾아오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스승의 제자가 되었으니까 스승의 아들이 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아들은 부모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자신을 닮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처럼 하면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부처님처럼 하는 것이 복을 짓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빨리 행복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어떤 생각을 가져야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겠습니까? 부처님을 들여다보면 부처님은 불쌍한 우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평생 행복의 기술과 방법을 전하셨습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진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법화경’에 준해서 그 가르침을 전하면 틀림없이 나보다 저 사람이 더 훌륭하게 되겠다,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경 수행의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처럼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다면 그 원이 뼛속에서 우러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쌍한 사람을 보면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그렇듯이 가슴에서 중생을 구제해야겠다는 마음, 측은지심이 뼈에서 우러나게 하다 보면 자신이 불행하려고 해도 불행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로 인해 화나거나 분하거나 잠자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사람이 공부를 해보면 귀가 절로 열리고 눈이 절로 열리고 마음이 절로 열립니다. 열린다는 것은 괴로움이 자꾸 줄어든다는 얘깁니다. 불행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멸하는 것입니다. 구름이 없어지면 햇살이 저절로 비치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불법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툭 떨어질 것도 없고 받아줄 것도 없습니다. 밝은 길로 가는 방법이 수행이고 그것을 이끌어주는 분이 스님이며 도반입니다. ‘법화경’을 읽고 쓰고 하다 보면 악한 마음을 낼 수가 없습니다. ‘죽으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조건을 갖고 다시 태어날 거야. 훌륭하게 태어날 거야’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 믿음 가운데서 하루라도 더 그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살면 점점 더 자신의 가치가 불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죽어도 좋고 살아서도 가치를 높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불자들은 사경을 못하겠다, 힘들다고들 합니다. 한글로 하고 사경 노트도 별도로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구하기 쉬운 공책에 가장 편하게 마련할 수 있는 볼펜으로 쓰도록 권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많이 쓰는 것보다 하루 한 자라도 틀리지 않고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그 의미를 알지 못해도 됩니다. 들어서 의미를 알고 생각해서 의미를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이지 그렇게 아는 것이 깨달음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모르려고 해도 알 수밖에 없는 그것이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과 부처님 가르침은 반야용선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서 고통이 없는 곳으로 건네주면 부처님 배는 필요 없습니다. 부처님 법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같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요즘 공부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도를 닦기 위해서 도를 닦습니다. 도라는 것은 닦지 않기 위해서 닦아야 하고 닦을 것이 없기 때문에 닦을 것이 없을 때까지 닦는 겁니다. 있다, 없다고 분별하면 도가 아닙니다. 도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가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지각이나 의식은 사실상 아무것도 쓸모가 없습니다. 쓸모없는 것을 내버리면 그 자리가 텅 빕니다. 그것을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적어도 이기심이 쑥 빠져 다 나가버리면 이기심이 있던 자리가 텅 빕니다. 그것이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 빈자리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욕을 하고 비난을 해도 그것에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사홍서원의 첫째 서원을 가지면 생각의 길은 전혀 달라집니다. ‘법화경’에 보면 “허물이 있는 것을 허물이 있다라고 하면 그 허물이 있는 것을 허물이 있다고 한 인과로 업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법은 이런 이치입니다. 수행은 이런 길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썩어서 말세라고 하더라도 이기심이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불자들이 스스로 마음을 내려놓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대한민국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말로 글로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무엇을 실천하는가. 바로 자리이타입니다. 자리이타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도력이 있어도 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리이타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모두의 마음이 행복하길’ 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그 마음이 전해질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가진 편안한 마음이 작게는 이 방에 전달되겠지만 그 편안한 기운은 자꾸 번져 나갈 것입니다. 따듯한 난로가 가운데 있으면 점점 따뜻함을 느끼게 되고 밖으로도 따뜻한 기운이 전달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가난하고 신도들도 가난해서 책 한 권을 사서 보라고 할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경전을 한 권을 사면 그 경을 직접 써서 나눠드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글 모르시는 분을 위해 글이 희미하게 보이는 복사본을 나눠드리고 베껴 쓰시도록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글을 모르는 분은 짧은 진언을 어떻게든 그림으로 표현해서 드리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스님들은 불자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항상 독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틈만 나면 공부 이야기를 하고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전화 안부를 주고받을 때도 공부 이야기를 빼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공부할 시간이 없다,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며 하지 않던 분들도 어느 날 진짜 다급한 일이 있으면 공부하게 됩니다.

바람이 있다면 스님이나 재가불자들이 더도 덜도 말고 사홍서원을 갖고 일체중생을 다 건지고자 하는 측은지심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지켜봐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점점 늘어나면 세상은 더 낙원으로 바뀌어 갑니다. 불교를 너무 어렵게, 너무 거룩하게만 보지 말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측은지심을 갖고 자신과 주위를 돌이켜본다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일러주는 것이 도반이요 스승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이고 가피력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3월2일 용수사 부산법당 차담실에서 진행된 ‘재가불자들을 위한 소참법문’에서 법화종 원로의장이며 용수사 회주 진파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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