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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④ (2)삼국통일전쟁에 참여한 불교승려-상

국가체제 정비에 기여한 불교, 삼국전쟁 쟁투에 승려들도 참여

불교가 국가정신수립에 공헌, 공동체 위한 전쟁 참여는 불가피
고구려 멸망 당시 신성, 장수왕 때 도림, 백제부흥 도침 대표적
고구려 혼란기에 스님들 대거 망명…일본이 가장 큰 혜택 입어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사적 90호 예산 임존성.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사적 90호 예산 임존성.

고구려・백제・신라 3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불교가 주역을 담당하였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하여는 근대 역사학계에서 일찍부터 크게 주목을 받아 상당한 연구업적이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3국 항쟁과 통일전쟁 과정에서 불교가 담당한 역할, 특히 불교승려들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으로 우선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전해진 자료가 대단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불교계로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이 담겨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불교는 평등과 조화, 자비와 평화를 주지로 하는 종교이자 철학이기 때문에 전쟁과 관련된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의 사욕을 위한 전쟁 참여가 아니고,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와 국가를 위한 전쟁 참여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3국의 항쟁과 통일전쟁에서도 비록 단편적인 자료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면밀히 조사하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활약한 승려들에 관한 기록을 다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도 불교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전제에서 본고에서는 전쟁에 참여한 불교 승려들의 행적을 밝히려고 하는데, 다만 선악과 시비의 판단은 일단 보류하고 사실의 서술 자체에만 충실하려고 한다.

3국 가운데 고구려는 17대 소수림왕 때에 가장 일찍 불교를 공인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이어 19대 광개토왕과 20대 장수왕 때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김으로써 부족연합적인 체제를 완전히 탈피하여 세계제국으로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장수왕 15년(427) 천도를 단행하기에 훨씬 앞서 광개토왕 2년(392) 평양에 9개 사찰을 세우고 있었음을 보아 새로운 수도의 도시설계에서 사찰이 주요한 요소의 하나였으며, 나아가 불교가 국가정신의 수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6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고구려는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는데, 귀족세력의 분열로 권력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본기’에 의하면, 24대 양원왕의 즉위과정에서 외척세력간의 권력투쟁으로 2000여명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데,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승려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진흥왕 12년(551)에 혜량(惠亮)이 신라로 망명을 요청할 때에, “지금 우리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되지 아니하니, 귀지로 데려가기 바란다”고 거칠부에게 부탁하고 있던 사실은 그 단적인 예이다. 

고구려의 정치적인 혼란에 따라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경향은 시대가 내려가면서 가속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28대 보장왕 9년(650) 연개소문의 구귀족세력의 제거와 독재정치에 의한 민심 이반으로 평양 반룡사의 보덕(普德)이 남쪽의 완산(完山, 지금의 全州)의 고대산으로 옮겨갔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보덕이 백제 지역으로 망명한 이유는 연개소문이 당으로부터 도교를 받아들이고 불교 사찰을 빼앗아 도교의 사원으로 삼게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말기 도교의 수입은 도교를 불교의 상위로 받들던 당태종의 종교정책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교와 연결된 구귀족세력을 억압하려는 연개소문의 사상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임도 부인할 수 없다. 고구려말기 정치적 혼란과 불교승려들의 망명은 신라와 백제의 불교를 진흥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사실 가장 혜택을 입은 것은 일본 불교계였을 것으로 본다. 6세기 말경부터 일본에 망명한 승려로서 혜편(惠便)・혜자(慧慈)・승륭(僧隆)・운총(雲聰)・담징(曇徵)・법정(法定)・혜관(慧灌)・도현(道顯) 등이 확인되는데, 혜자 같이 고구려로 다시 돌아온 인물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일본에서 끝까지 머물면서 그곳의 불교발전에 기여하였다.

고구려의 승려 가운데서 국가의 멸망 당시 군사 활동으로 최후를 장식했던 인물은 신성(信誠)이었다. 보장왕 25년(666) 대막리지로서 독재적인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동생 및 세 아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쟁탈전은 더욱 고구려의 운명을 재촉하였다. 즉 연개소문이 사망한 바로 그 해에 동생 연정토는 성읍 12, 인민 763호, 3543인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으며, 맏아들 남생은 둘째 아들 남건에게 쫓겨 국내성에 가서 당에 항복하였다. 이에 남건이 막리지가 되어 군사권을 장악하고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방어하게 되었는데, 보장왕 27년(668) 왕은 셋째 아들 남산으로 하여금 당군에게 항복케 하였다. 그러나 집권자인 남건은 평양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하였는데, 전세가 불리해진 가운데 군사를 승려인 신성에게 맡겨 당군을 방어케 하였다. 그런데 고구려 운명의 최후에 군사를 맡게 된 신성은 소장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을 몰래 당의 장군 이적에게 보내어 내응할 것을 요청하였고, 마침내 5일 뒤에는 신성이 성문을 열어주어 왕과 남건은 사로잡히게 하였다. 신성은 고구려 멸망의 공적으로 당으로부터 종3품에 상당하는 은청광록대부를 받았는데, 일찍 항복한 남생이 정3품의 우위대장군, 남산이 종4품의 사재소경을 받았던 것에 비하여 상당한 우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성은 고구려 운명의 최후에 불행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쳤으나, 승려가 군사를 담당하였다는 사실은 좀 더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훨씬 후대이지만 고려말기 최영(崔瑩, 1317~1389)의 말 가운데, “당의 태종이 고구려를 쳐들어 왔을 때에 고구려에서는 승군(僧軍) 3만을 동원하여 당군을 격퇴하였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로 보아 신성은 수행에 전념하는 순수한 승려는 아니고 원래 승군을 지휘하는 직책을 맡았거나, 군사 관계의 일을 담당하다가 최후의 위기순간에 군사권을 위임받아 고구려 멸망의 마지막을 장식한 불행한 인물로 보인다.

한편 백제는 15대 침류왕 때에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국가발전은 그보다 앞서 13대 근초고왕 때에 이미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고구려에 의해서 한의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당할 때에 그의 주민과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유리한 지정학 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1대 개로왕 21년(475)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면서 국가발전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다만 한성이 함락될 때 등장하는 승려 도림(道琳)의 존재는 좀 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한성 침공에 앞서 도림을 간첩으로 파견하였는데, 도림은 바둑을 매개로 개로왕에게 접근하여 국력을 피폐케 하는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한 다음에 고구려로 도망가서 장수왕에게 침공하도록 보고하였다. 승려의 행색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간첩행위는 불교 승려의 본분에서는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할 가치는 적다고 보지만, 3국 항쟁과정에서는 흔히 일어났던 사실로 확인된다. 신라 24대 진흥왕 때는 거칠부가 승려의 모습으로 고구려에 잠입하여 염탐하다가 승려 혜량에게서 도움을 받고 신라로 망명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사실도 있었다. 또한 27대 선덕여왕 11년(642)에는 백제에 의해 대야성이 함락당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의해 당으로의 통로인 당항성이 위기에 처하자, 김춘추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갔던 사실에서도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덕창(德昌)이 등장하였다.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억류당하여 약속한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하자, 신라는 김유신의 결사대 3000명을 출동시키려고 하였는데, 이 사실을 염탐한 덕창이 고구려왕에게 알려주어 김춘추를 돌려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백제는 26대 성왕 16년(538) 국도를 사비로 옮기고 중흥을 모색하면서 불교도 융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32년(554) 한강 유역을 독점한 신라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성왕 자신이 패사함으로써 국가 부흥에 좌절을 겪게 되었다. 이후 27대 위덕왕・28대 혜왕・29대 법왕・29대 무왕에 이르는 동안 왕호를 불교식으로 짓고 수많은 사탑을 건축하면서 불교를 통한 국가의 중흥을 기원하였다. 이렇게 불교를 융성시키려는 역대 왕들의 정책은 백제가 멸망당한 직후 승려 도침(道琛)의 부흥운동으로 나타나 마지막 순간의 불꽃을 발하게 하였다. 도침의 백제부흥운동은 고구려의 최후 순간 승려 신성이 군사권을 장악했던 사실에 비교될 수 있으나, 도침은 훨씬 적극적인 군사 활동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점에서 역사적으로 훨씬 높게 평가된다. 도침의 부흥운동에 관한 자료는 ‘삼국사기’ 문무왕조・의자왕조 이외에도 그의 근거자료인 신구의 ‘당서’ 백제전과 ‘유인원기공비’, 그리고 ‘일본서기’ 사이메이(齊明)천황조 등에 전하고 있다. 백제 유민들에 의한 부흥운동은 의자왕 20년(660)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7월18일부터 시작하여 사비성과 웅진성 등을 포위하여 주둔하는 당의 군대를 곤경에 빠뜨렸으며, 여러 차례 당과 신라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특히 승려인 도침은 왕족인 복신(福信)과 함께 주류성(한산)에 웅거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한때는 200여개의 성을 회복할 정도로 기세를 떨쳤다. 9월에는 달솔 직위에 있는 사람과 불교승려인 사미 각종(覺從)을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멸망 사실과 부흥운동 상황을 전해주고 있었는데, 일본과의 대외 연락에서도 승려가 활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0월에는 군사원조를 요청하고, 아울러 일본에 머물던 왕자 부여풍(豊)을 맞아다가 국왕을 삼았으며, 웅진강 입구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나당연합군과 대치하였다. 다음해 3월에는 사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대흥)으로 근거지를 옮겨 장기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곳에 집결한 부흥운동군은 체제를 정비하여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고 칭함으로써 도침이 부흥운동군의 총수가 되었다. 도침과 복신 2인의 장군 칭호의 의미로 보아 도침은 군사를 통솔, 복신은 형벌을 주관(霜臺는 형벌을 관장하는 秋官의 다른 이름)하는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침은 당의 유인귀가 보낸 사신의 관위가 낮아서 한 나라의 대장이 만나기에 합당치 않다고 접견조차 하지 아니하고 돌려보내는 기염을 토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부흥군의 총수인 대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당서’나 ‘유인원기공비’ 등의 사료에서 영군장군 도침을 상잠장군 복신보다 앞에 열거하였던 것도 도침이 상위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안 돼 도침은 복신에게 살해당하고, 복신은 왕자 풍을 제거하려다 도리어 죽임을 당함으로써 부흥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귀족출신으로 좌평까지 오른 복신이 승려인 도침의 주도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77호 / 2021년 3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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