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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걱정이다

기자명 민순의

꽃이 피었다. 둥실둥실 꿈무더기 같은 뽀얀 목련들이 망막에 들어와 알알이 꽂히더니, 여기저기 담벼락을 노랗게 물들이며 개나리들이 제 기색을 드리운다. 급기야 가지 끝마다 수다스럽던 벚꽃의 봉오리가 우수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보다 부지런한 매화와 산수유가 인사를 청해온 게 벌써 수주 전이다. 꽃이 피었다. 봄꽃이 피었다. 일제히. 봄이다.

그런데 얘들이 벌써 이럴 때가 아닌데. 달력을 본다. 3월 하순.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3월 안에 이 기세의 봄꽃을 보는 게 처음이다. 매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려도 꽃은 번번이 4월이 되고서야 왔었다. 가장 이른 기억이 3월 말의 하루 이틀. 정말, 올해 처음 산수유를 만나 기뻤던 게 3월 첫 주였다. 이 달 첫날 내린 때늦은 눈으로 온 산이 쑥버무리 같던 때로부터 채 며칠이 안 돼 갑자기 포근했던 날이었다. 덜컥 겁이 난다.

너무 이르다. 이 봄의 소식이. 그리고 또 기후의 변화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어린 시절의 공익광고 하나가 기후변화와 환경보호에 관한 것이었다. 어느 노부인이 방호복을 입은 채 눈길을 뚫고 귀가하는 아들을 맞으며 아득하고 지친 표정으로 공기와 물이 맑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었다. 저 노부인이 내가 될 수도 있을까? 설마. 저건 아마도 먼먼 미래의 얘기일 거야. 내가 죽을 때까지 저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그리고 저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면 돼. 어린 나이에도 망연한 충격을 꾹꾹 누르며 마음을 다독였었다.

지금 밖은 황사와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리다. 마스크 없이 숨을 쉬기 힘들다. 얼마 전 아라비아의 사막에 눈이 내렸다는 기사를 접했다. 지난 몇 년간 대규모의 산불로 고생했던 호주에 이번에는 큰물이 져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한국의 삼한사온은 자취를 감추었고, 어린 친구들은 하지 직후 시작해 7월 말에 끝나는 장마철을 모르며, 각종 농작물의 명산지는 북상한 지 오래다. 수십 세대 동안 익숙했던 환경이 불과 몇 년 만에 바뀌고, 내가 아는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동시대의 우리는 지금 살아생전에 목도하고 있다.

세상에 영속하는 것은 없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다. 4만년 전 출현한 현생인류는 다른 인류의 멸종 끝에도 살아남아 유일한 인류로서 지금까지 살아 왔다. 영민한 슬기와 엽렵한 손길로 문명과 문화를 이루어 번영해 왔지만, 그 과정에서 빚어진 타종족과 환경의 파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우리 인류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인류가 사라진대도 다른 생명들은 더욱 번성히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이고, 설혹 세상 모든 생명이 사라진대도 지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겠지. 지구가 본래 인간의 것은 아니니까. 슬기와 손재주로 흥한 우리가 바로 그 슬기와 손재주로 소멸하는 것뿐이다. 당연한 업보다.

그렇지만 내가 지은 업보를 내 자식과 손자가 받게 하고 싶지는 않구나. 그 아이들이 인간 세상의 문을 닫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 우리의 악업은 우리가 끊어야 되지 않을까. 이제부터라도 지구와 환경에 선한 업을 지어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나. 선업으로 새로 짓는 세상은 지금의 편리함과 결별해야 하는 곳일 수 있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모든 면에서 느리고 불편한 삶을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게 우리 종족의 생존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이라면 그렇게 하자. 인류에게 언젠가는 들이닥칠 소멸이라지만, 그 순간을 내 손길이 가 닿을 근연의 후손들이 감당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없다. 전문가들은 마지막 기회로 10년을 이야기한다. 2050년을 환경 불가역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본다면, 개선된 2050년을 준비하는 데에 최소한 20년은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우리는 삶의 양태를 바꾸어야 한다. 춘래불사춘. 태어나지 않은 손자를 생각하니, 이 봄, 봄이 걱정이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장 nirvana1010@hanmail.net

 

[1579호 / 2021년 3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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