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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향기-충남 석림사 성공 스님

기자명 김민경
  • 해외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황산벌에 핀 한송이 연꽃

봄 들녘이 긴긴 겨울잠을 툭툭 털고 기지개를 켠다. 차창 안으로 내리 쬐는 햇빛에 목 뒤가 스물 스물 젖어들었다. `취재거리가 안되는 시골 스님입니다, 부러 오고 그러지 마세요' 전화선 저편의, 편안한 느낌의 스님은 취재를 한사코 사양했다. 근처에 가는 김에 들르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마세요하고 일단 출발했다. 걱정이 내 머리 위에, 옷깃에 먼지 처럼 내려앉았다.

기와지붕에 흰 회벽이 눈부신 석림사. 행여 스님이 피신이라도 했을까 싶어 종무소부터 달려들어갔다. `스님은 법당에 기시유, 기도 하고 기시유' 허리 굽은 노보살의 말에 일단 안심. 사시 마지. 부처님이 공양을 드시고 계셨다. 자그마한 몸집을 지닌 성공(性功)스님의 축원이 이어졌다. 기이했다. 십여법당 안에 스님은 한 분인데 십 여명 이상의 비구니 스님들이 한마음, 한목소리로 염불하는 듯한 힘이 느껴졌다. 출가 직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108 참회를 올린 원력이 스며 있기 때문일 게다. 기도를 마치고 법당 아래 어린이집으로 내려왔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반주에 맞춰 신나게 불러제낀다.

“아이들이 많네요”
“건물이 별볼일 없는 데 비하면 잘되는 편이래요. 4개반 80명의 원아가매일 오후 3시나 5시까지 수업을 받고 있어요”

석림사에 유치원이 설치된 것은 10년전. 논산 시내에도 유치원이 두 개밖에 없던 시절이다. 지금은 어린이집으로 운영 중이다. 원장스님을 포함하여기사와 선생님 등 직원이 9명이나 되는 규모. 대형 유치원이 많은 논산 시내와 연무대 쪽에서도 아이들이 `유학'온다. 점심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마당 가득 쏟아져 나와 뛰어 다니기 시작한다. 새처럼 지저귀는 목소리들이맑은 공기 속에서 이리저리 메아리지며 부서졌다.

어린이집을 품고 있는 석림사에는 `시골절 답지 않게' 10여년 전부터 어린이법회가 설치되고 뒤이어 중고등학생법회, 대학생들도 참가하는 청년회법회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불교교양대학에다가 합창단까지. 성공 스님은 초하루·일요법회는 물론 석림사에서 열리는 모든 법회를 직접 지도한다. 어린이법회를 담당하는 4명 선생님을 수시로 교육 보내는 등 모든 단체에 물심양면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97년부터는 논산시로부터 청소년자원봉사센터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스님은 종일 법회(기도)와 일 속에 묻혀 산다. 새벽 3시 기상, 3시 반 예불. 주력과 참선 후 6시반 아침 공양, 8시반 자원봉사센터 출근, 업무를 본 후 절에 돌아와 10시부터 사시마지. 오후엔 법회와 공무. 청소년자원봉사센터를 위탁받기 몇해 전부터도 절 앞에 상담 및 봉사기구를 설치·운영했다.

“귀찮지 않으세요? 법랍이 이미 40년을 바라보고 세수(世壽)도 환갑을눈 앞에 두고 계시잖습니까. 요새는 젊은 스님들도 스님처럼 일을 벌이지않는데요” 건방지고도 한심한 질문. 잠시 웃으시며 “선방 다니며 공부하지 않을바에야 포교 열심히 하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 아닌가요”라며 명쾌하게 답한다. 그 말에 스님의 피부가유난히 창백함을 깨달았다. 40세 직전 크게 병을 얻어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고한다. 대수술 끝에 위기는 넘겼지만 걸망 매고 선방에 방부들이는 것은더 이상 무리였다. 초발심자경문과 치문을 뗀 후 기도와 선 공부만 알고 살았는데 뜻하지 않게 만난 병고(病苦) 덕분에 뒤늦게 포교의 길에 뛰어들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스님을 사문의 길로 이끈 것도 병고였다. 조실부모하여 큰아버지댁에서 컸던 스님은 늘 아팠다. `불투명한 인생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 병을키웠다'고. 10대 후반에 보다못한 어느 절 신도회장이 `큰 스님들 법문 좀들어보라'며 스님을 절로 이끌었다. 그 인연으로 한 두해 절에 머무르며 기도했다. 그러다 우연히 〈팔상록〉을 읽게 되었다. 눈이 확 밝아지더란다. 꿈이 컷던 만큼 샘이 많았고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하며 절절 끓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이런 삶도 있구나!' 세상을 달리 보게되었다. 그 길로 발심하여 출가했다. 〈팔상록〉을 처음 읽고 얻은 그때 그환희심이 40여년간 스님을 지탱했다.

병으로 인해 더 이상 치열한 구도행을 할 수 없게 되자 `이 좋은 부처님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겠다'는 생각만 남더란다. 10년 가량 한산 봉선사에서 주지 소임을 살다가 85년 논산시 근처에 절을 지을 인연을 만났다. 터를 닦고 완공까지 만 3년. 절 지을 재원이 없었지만 열심히 기도하는중에 어느덧 건물은 올라가고. 그리고, 불사의 피로가 다 가시기도 전에 어린이법회와 유치원을 시작했다. 어린이법회에 참가하던 아이들이 커서 중고등학생법회와 청년회법회는 저절로 결성됐다.

성공 스님은 논산 일대에서 `스님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군부대로, 도시로, 농촌으로, 그리고 병원으로. 스님의 활약상을 눈여겨 보던 이들은 석림사를 방문하곤 깜짝 놀란다. 생각보다 절이 작아서. 그리고 또한번 놀래야 한다. 스님이 이끌고 열성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불교 안팍 단체의 수가 열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는 것과스님이 절에서 키우는 아이들도 늘 십여명 가까이 된다는 사실에. `충청도는 포교하기 힘든 곳'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성공 스님이 이룬 많은 성과들은 `무슨 일이든 원력을 세우고 하기 나름'이라는 진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저런 꿈도 많았을 스무살 무렵에 출가 하여 비구 스님네들보다 확실히 `혜택'도 없는 한국의 비구니로 고되게 고되게 40여년을 사시면서 단 한번이라도 출가를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우리 세대는 그래요, 어른 스님이 하라시는데로 공부하고 또 그게 다인줄 알고 절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래서인지 후회하거나 크게 기뻣던 적은별로 없었던 것 같고 …. 전법이 생각보다 잘 안될땐 `내 능력이 많이 부족하구나, 조금 더 노력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지내왔어요. 종단에서포교에 조직적인 지원과 유용한 정보가 공유될 수 있도록 힘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지금은 저보다 나이 어린 스님이라도 포교 야무지게 잘한다는 스님을 제일 존경해요, 공부 많이한 스님도 훌륭하지만 …”

스님이 안되었으면 지금 무얼 하고 계실까. 아마 가축을 키웠을 것이란다.어렸을 때부터 어쩌다 작은 돈이라도 생기면 장에 가서 병아리며 토끼며 사안고 와 키웠다.
`스님, 축생불사에서 인재불사로 사업을 키우셨네요'하자 파안대소 하신다.


글·사진 = 김민경 기자
mkklm@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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