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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의식의 지체(遲滯)

기자명 윤원철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를 비롯해서 모든 것이 모자라는 처지가 보편적이었던 시절에 성장한 이들은 대개 자연스럽게 절약이 몸에 배었을 것이다.굳이 애쓰지 않더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낭비하려고 해야 낭비할자원이 없었고, 생존을 위해서는 검박(儉朴)이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일반 가정에는 밤에만 몇 시간 전기가 들어오고, 그것도 전압이 모자라 전등이 가물거리는 풍경은 이제 없다. 꼭지를 틀어도 수돗물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었고, 그래서 물 나오는 시간 맞추어서 받아두어야 하고, 나오더라도 수압이 낮아 쫄쫄거리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꼭지를 틀면 반드시 수돗물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고,아무리 펑펑 써도 한 달에 몇 천 원이면 된다. 전화기는 꽤 괜찮게 사는 집이 아니면 보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없는 집 찾기가 어렵다. 무선전화니 휴대전화니 해서 몇 대씩, 회선도 몇 개씩이나 사용하며, 직장에서도 개인 책상마다 전화와 컴퓨터가 놓여 있다.

이런 풍요를 당연하게 여기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전기, 전화, 물 같은것까지 일일이 아껴 쓰는 생활 태도를 몸에 배게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자원이 풍요롭게 널려 있는데 억지로 절약하려면 참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데, 거기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물자를 써버리는 것이 손쉽다. 검박이 몸에 밴 세대도, 자기 자신은 몸에 밴 대로 낭비를 삼갈 지라도 그것이 몸에 배지 않은 자식 세대를 일일이 단속하려면 웬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자원을 아무리 충분히 마련하고있다 해도, 검박, 절약의 중요성은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그 점은 어느 곳,어떤 시절에나 마찬가지이다. 검박, 절약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영원히중요하게 가치 있는 생활 태도라는 얘기이다. 워낙 궁핍한 시절에는 할 수없이 절약해야 했겠지만, 이제 아무리 풍요롭게 된 시절이라 해도 그것은 결코 뒤로 밀쳐 놓을 수 없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요청이다.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하염없이 엄청난 규모로 자연을 파먹다 보면, 조만간 개개인의 살림살이 정도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여건이 돌이킬 수 없이 피폐해질 것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제 좀 풍요롭게 되었다고 해서 검박한 생활 태도를 유지하기 곤란해하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의식의 확장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제 한 몸의 형편만을 자기 살림살이로삼을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살림살이를 곧 나의 문제로 절실히 통감해야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 문제니 에너지 문제니 해서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필수성은 충분히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그저 고개나끄덕이는 데 그칠 뿐 체화(體化)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 한 몸의 사정에 푹 빠져 있지만은 않고 우주 전체의 살림살이가 곧 나의 일이라고 여기며 산다는 것은 다분히 종교적인 차원의 각성을 요구한다.불교 용어로 말한다면 연기적 존재(緣起的 存在)로서 거듭 나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절에 종교가 인류를 위해 기여할 가장 중요한 일 하나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기왕에 가지고 있는 범우주적인 안목으로써 우리의 시야를 세상 전체로 넓혀 주고, 우주 전체의 일을 곧 자기의 살림살이로 삼을 수 있도록 의식을 깨우쳐 주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그런 역할을 하려면 우선 종교들부터 제 살림살이에만 빠뜨리고 있는 발을 뽑아내어 큰 걸음을 딛어야 할 것이다.


윤원철/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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