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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불교교리 - 상좌부의 전개과정

기자명 법보신문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주의주장 분명…논쟁 거치며 상호발전

회통불교의 병폐

한국불교의 특징이 과연 회통불교인가에 대해서 논쟁이 있습니다. 회통불교는 여러 대립적인 견해를 잘 모아서 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파는 이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종파는 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이 서로 대립되는데,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 듯이 보이는 주장을 조화시키는 것이 ‘회통’입니다. 한국불교가 회통불교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현재 한국불교계를 바라 볼 때 회통불교의 병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서로 다른 주장이 있고, 자신의 입각점이 분명할 때, 비로소 회통하겠다는 게 의미가 있는 거지, 그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싫지 않다는 식이 되어서는 고유의 색깔과 향기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저것 쌓아 놓은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서로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하고, 이것이 옳다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에 비해 인도의 부파불교에서는 분명히 자신의 목소리가 있고, 그에 따라 각각의 부파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서는 상좌부의 전개과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1단계로 설일체유부와 설산부(雪山部)로 나뉘어졌습니다. 설산부는 동남아시아에 퍼져 있는 상좌부불교의 모태입니다. 이 부파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에 대부분 따르면서도 보살의 의미를 강조하고, 설일체유부에서 높이 평가하는 아라한에 대한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설산부와 설일체유부의 차이점이 생겼습니다. 이후의 상좌부의 전개과정에서는 설일체유부가 중심적 위치에 섰습니다.



자아없이 윤회가능

그 다음 2단계로 윤회의 주체를 놓고, 설일체유부와 그 견해를 달리해서 생긴 것이 독자부(犢子部)입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미지근하게 말하고 있던 문제를 독자부에서는 아주 과감하게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자아란 없다는 초기불교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자아가 아닌 윤회의 주체를 설정하고, 그래서 자아가 없지만 윤회가 가능한 것이라고 정면돌파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3단계로 새롭게 등장한 부파가 화지부(化地部)입니다. 이 부파는 설일체유부의 핵심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존재한다는 것에 반대합니다. 설일체유부에서 과거와 미래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래야 업보가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지부에서는 업보가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주장을 폅니다. 과거의 것은 이미 사라진 것이므로 없는 것이고, 미래의 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상황뿐이라는 겁니다. 이 점은 우리의 상식과도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애인은 이미 떠나가 버렸고, 미래에 더 좋은 배우자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건 두고 봐야할 일이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부파에서는 여기에 덧붙여 변하지 않는 존재인 무위법을 더 자세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착하지 못한 일에도 진여(眞如)가 존재하고, 착한 것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닌 중간적인 성격의 무기(無記)의 일에도 진여가 깃들여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쁜 일을 해도 그것이 변하지 않는 그 무엇으로 남아있게 되고, 중간적인 일을 해도 어딘가 저장되어 있게 됩니다.



업보의 문제 무위법으로 해결

요즘 날씨가 쌀쌀한데도 모기가 활동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이 놈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잠복하고 있다가, 보일러를 가동해서 조금만 여건이 좋아지면 활동합니다. 그래서 이 부파에서는 업보의 문제를 무위법으로 해결했습니다. 또 이 부파는 승가(僧伽)에 보시하면 커다란 과보를 얻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승가에 부처님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처님에게 보시하면 공덕이 별로라고 합니다. 이건 어디서도 보지 못한 색다른 주장입니다.

4단계로 법호부(法護部)가 나타나는데, 이 부파는 화지부의 과감한 주장에 대해 반론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에게 보시하는 게 큰 과보를 받는 것이지, 승가에 보시하는 건 적은 과보를 얻게 되는 것이고, 나아가 탑에 공양하는 것도 좋은 과보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부파불교의 전개에는 논쟁점이 있고, 서로 대립하면서 발전했습니다. 대립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화입니다.



이병욱 (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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