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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신규호 거사

기자명 법보신문
"삶과 죽음을 여일(如一)하게"
상가와 장지에서 염불 봉사 '죽음'을 자비정신으로 보듬어

어떤 사람 평생 동안 죄업지어도
임종시에 정신 차려 염불하거나
설사 참회 못하고서 죽었더라도
자손이 일념으로 염불한다면
죄업은 소멸하고 극락에 나니
금일 대중 영가 위해 무상묘법과
아미타불 크신 성호 일컬으리니
영가여 일심염불 함께하시라
-망자를 위한 독경염불 중에서

인간의 마지막 통과의례, 죽음. 그 죽음을 부처님의 자비정신으로 보듬는 사람들이 있다. 원왕생(願往生)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태어나도록 원을 세운다는 뜻이다. 20여년전부터 교계 한켠에서는 돌아가신 이를 마지막으로 예우하는 산 자들의 정성어린 예법인 불교식 상^장례의식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이를 불교계에서는 원왕생교육이라고 한다. 불자들이 가족이나 법우(法友), 친지들의 상을 당하였을 때 여법하게 망자의 극락왕생을 발원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염불봉사에 나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보조(菩照) 신규호 거사는 지난 십수년동안 일반불자들에게 상가에서 활용 할 수 있는 불교식 장의의식을 강의해 왔다.

눈처럼 하얀 백발에 고운 피부, 조용한 성품을 지닌 이 노 신사는 내년에칠순을 맞지만 그의 하루 하루는 삼십대 젊은이 못지 않게 바쁘다. 그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천안의 집을 나서 서울로 향한다. 불교방송 부설 불교문화센터 등 세 군데 이상의 불교단체에서 상가용(用) 염불과 독경 교육을 담당하는 때문이다. 보조거사가 자신의 일도 아닌 타인의 ‘죽음의 문제'에 눈을 돌린 것은 지난 84년부터이다.

82년 불광사에는 불자들의 상·장례를 돕는 연화부가 창설됐다. 15명의불자들이 주축이 돼 탄생한 이 단체는 불광사 신도가 상을 당하면 상가에찾아가 염불하고 모든 장례 과정을 성의껏 돕는다.

보조거사는 연화부의 부장을 84년부터 맡아 91년까지 활동했다. 광덕스님에게 염불을 배우고 장례 진행에 관한 각종 절차와 예법은 ‘현장'에서 배워나갔다.

연화부 부원들의 ‘염불봉사'를 필요로 하는 장례가 불광사에서만 1년 평균 1백50건.

연화부를 대표하는 그는 더욱 바쁘다. 시간과 장소가 그날의 당번 부원들과 맞지않거나 부원들을 보낼 수 없는 먼 곳의 상가는 무조건 그의 차지.어느해 정월달에는 열다섯번이나 산(매장지)에 갔다. 정월달 한달을 한마디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땅까지 꽁꽁 얼어붙은 영하의 장지에서 살았다. 벽제화장장에서는 한때, ‘보조거사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장지가 지방인 경우는,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차안에서도 5시간이고 7시간이고 염불을 멈추지 않았다. 상을 당한 후 3일 동안 하루 세 번씩, 한 번시작하면 최소한 4시간 이상 계속되는 상가염불.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목에서 피냄새가 올라온다. 몸은 젖은 솜처럼 천근만근 무겁다. 그보다더 괴로운 것은 귓전을 떠나지 않은 자손들의 곡소리와 망자의 하관 모습이다.

“잠자리에 들면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모습과 소리를 잊기 위해 광덕스님이 가르쳐 준대로 〈화엄경 약찬게〉를 무수히 암송했습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화장장에서 망자의 뼛가루와 찹쌀을 맨손으로 비벼도 아무렇지 않게됐다. 말그대로 삶과 죽음의 여여(如如)함을 체득케 된 것이다.

보조거사가 불교를 만난것은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하는 50세 때. 그러나 불연의 싹을 틔운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거사의 어머니는 15세때 시집 왔으나 일곱해가 지나도록 태기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지친 시어머니가 매일 절에 찾아가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삼년.

보조거사는 어머님 나이 26세때인 1930년 부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할머니의 신심과 부처님의 가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 하지만 신실한 불자가 못되었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8년간 군인의 길을 걷다가 55년에 제대하여 공무원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마침내는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심정이 되어 아내가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그에게 관악산 연주암 올라가는 길모퉁이에 움막을 짓고 산신에게 삼칠일간 기도하라는 기이한 ‘비책'을 권했다. 무당의 말에 따랐다. 그만큼 절박한 날들이었다.

기도를 시작한 후 보름 쯤 지난 어느날, 갑자기 내린 폭우로 한 비구니스님과 신도가 그의 움막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스님은 그에게 정법불교를 만날 것을 권하며 《불자지송집》한 권을 건네 주고 떠났다.

불연(佛緣)이었다.

이후 〈불광〉지를 읽고 찾아간 광덕스님에게 불법을 배웠다.

51세에 사경을 시작했다. 군(軍)에 복무할 때 인사행정과에 있었기에 글씨를 반듯하게 쓰는 것 만큼은 자신있었다. 잘 쓰는 글씨로 부처님을 더 가깝게 느낄 일을 찾던 중 사경을 생각해냈다. 그 다음날부터 좋아하던 술과담배를 끊어 버리고 아침마다 목욕재계 한 후 붓을 잡았다. 제일 먼저 쓰기시작한 것이 〈반야심경〉. 〈반야심경〉은 한 자를 쓴 후 3배하며 써나가고 〈금강경〉은 한 줄을 쓰고 3배한다. 처음에는 〈금강경〉도 1자 3배했으나 그러다 보니 글씨의 크기가 고르지 않게 돼 한 줄을 쓴 후 3배하고 있다.

“저는 사경을 하는 일련의 과정이 부처님의 몸을 만드는 과정과 같다고여깁니다. 그래서 먹을 가는 과정에서부터 정성을 들이지요. 사경을 시작하고서 남보다 다소 급했던 성격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사경은 그에게 또다른 불연을 안겨 주었다. 종로 대각사에서 불광법회를이끌던 광덕스님이 석촌호수변에 불광사를 지을 때 그는 일주일에 한 틀씩,모두 24틀의 〈금강경〉병풍을 완성해서 신도들에게 보급했다. 그렇게 모은시줏돈을 불사를 위해 내놓았다. 그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경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사경을 계속하는 이유는 세가지 입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나를 부르심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둘째는 남은 여생동안 경전의 말씀을 많이 생각하고 싶은 욕심에서, 셋째는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지니게 하고픈 바람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내 삶이 다 할 때까지 사경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경에 매진할 수 있는 시간을 내기가 갈수록 힘들다고 한다.

늦게 나마 불교장의의식의 중요성에 눈 뜬 사찰과 불교단체들이 늘게 되어 그에게 관련 강의를 요청해 오는 탓이다. 그래도 그는 지금 매우 즐겁다. 상가염불의 포교효과를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까닭이다.

“망자를 위해서 일심으로 염불하고 경황 없기 일쑤인 상가의 의례를 여법히 진행하도록 도와주면 장례를 치른 후 상가에 왔던 모든 친척이 ‘어느절에서 나왔느냐, 법회는 언제 갖느냐'하며 물어옵니다. 도움을 받은 상주들은 몇년 혹은 십여년이 지나도 길에서 식당에서 저를 알아보곤 저의 손을 잡고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하며 인사 합니다. 그 순간에는 쌓인 피로가 싹 가시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환희심이 일지요”

상가염불은 망자에게나 상주에게나 염불봉사에 나선 이 모두에게 큰 공덕이 된다는 설명이다.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임종염불과 상가염불을 한달에 몇번 안나가지만 꼭 그의 염불을 망자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몇몇 상가의 요청까지는 외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시다림의 중요성에 대한 불교계의 인식이 나날이 좋아져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경향 각지의 모든 사찰에 상가염불봉사단이 조직될 때라고 봅니다. 부처님께 그 날이 하루빨리 이뤄지도록 언제나 기원하고있습니다.”

취재수첩-칠순 노(老)거사의 열정
보조 거사를 처음 만난 것은 3년전, 불교장의의식과 관련된 자료를 제공받기 위해서였다.

자신에 대한 인터뷰도 아니고 단지 “갖고 계신 자료를 쬐끔 보여달라”며 청한 자리였는데 보조 거사는 갈 길 바쁜 일정을 쪼개어 시간을 내어 주었다. 깔끔한 백발만큼이나 잘 정리된 자료, 불교장의의식의 생활화에 대한열정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따로이 한 번 지면에 모실만한 분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죽음의 문제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장의 의식과 장례식장의 풍경에 대한 거사의 체험담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생생하고도 귀한 '증언'들이었다. 특히 염불봉사 나온 이들에게 따뜻한 물 한잔 권할 줄 모르는 일부 ‘현대인'들의 이야기는 정말 의외였다. (우리 불자들은 정말 그러지 맙시다)

보조거사는 불법을 만난 후 얻은 ‘환희심'을 자주 언급했다. 인터뷰를하는 중에 기자는 기자의 마음자리에 그의 환희심이 이슬비처럼 젖어드는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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