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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11]-산은산, 물은 물이로다

기자명 정찬주
  • 불서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제2장 문 없는 문(6)

마침 운부암에는 금강산에서 수행하다 온 노승이 있었으므로 성철은 눈에선할 정도로 금강산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금강산의 고찰들인 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訓寺)·정양사(正陽寺)·유점사(楡岾寺)·신계사(神溪寺)를 비롯해서 산 속의 팔만구 개 암자 중에 가장 특이하게 보이는 보덕굴(普德窟), 금강산의 심장부에서 선풍을 드날리고있는 마하연(摩詞衍) 등의 이야기를 틈틈이 들어 잘 알고 있음이었다.

노승의 기억력은 매우 뛰어나 산문 안팎의 풍경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이야기하곤 하였었다.

“원산에서 왔든 철원에서 왔든, 장안사로 가는 모든 산길이 합쳐지는 말휘리. 여기서 장안사까지는 이십오 리. 그리 먼길이 아니지. 말휘리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 만폭동에서 흘러오는 동금강천을 따라가다 보면 이태조가왜구를 토벌하고 지나다가 나뭇가지에 잠시 활을 걸어두었다는 괘궁정(掛弓亭)이라는 조그만 정자가 나오지. 거기서 쉬었다가 조금 더 가면 거탑리가나오고 비로소 금강산 관음봉이 또렷해지고 연이어 신령한 산봉우리들이 보이게 되지.”

다리 이름도 하나하나 한자까지 정확하게 기억을 했다.

“거탑리의 향선교(向仙橋)를 건너, 솔 향기가 녹아 흐르는 남천교(南川橋)를 지나, 장안사 앞 계류 위에 있는 자연의 돌덩어리로 만든 만천교(萬川橋)를 건너면 바로 만수정(萬水亭)이 나오고, 또한 누문(樓門)에 금강산장안사(金剛山 長安寺)라는 편액이 보이지. 편액 옆에는 임제종 제일가람(臨濟宗 第一伽藍)이라는 힘찬 글씨가 보이고 말이여.”

그런가 하면 사찰에 전해오는 시인묵객들의 시조차도 빠짐없이 외웠다. 특히 청학봉을 등진 채 법기보살이 나투었다는 법기봉(法起峰)을 옆에 두고태상동(太上洞)·만폭동(萬瀑洞)의 절경들을 아우르는 표훈사를 지나, 뒷산길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정양사의 헐성루(歇醒樓) 등에서 지어진 시들을 줄줄이 외웠던 것이다.

“헐성루에 서면 내금강의 일만이천봉을 다 볼 수 있지. 절 이름인 정양(正陽)은 금강산의 정맥이란 뜻인데, 과연 헐성루에 서 보면 그런 기분이들지. 그러니 시인묵객들이 시 한수를 지어 남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게야.” 직제(直齊) 이기홍(李箕洪)은 금강산의 풍광에 압도되어 정양사를 떠나지못했다고 한다.

가마를 재촉하여 정양루에 오르니
만 이천봉이 눈 아래서 떠도네
온종일 난간에 비껴 진경을 대하니
내 몸이 이것 되어 떠나지 않는구나.
肩輿催上正陽樓
萬二千峰眼底浮
盡日憑欄眞面對
吾行到此便宣體

종산(鍾山) 조존집(趙存集)도 아홉 번 죽을지언정 결코 못잊을 헐성루라며 드러난 풍광에 자신의 생각마저 놓아버린다. 일만이천봉의 장관에 어느새 넋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일생에 한번 정양사에 머무르니
아홉번 죽어도 못잊을 헐성루여
더 높이 올라 무엇을 바라보랴
금강의 진면목이 여기에 다 있는데
형용도 할 수 없고 생각도 떠났네
모여선 묏부리 이름따라 족하도다.
一生卽住正陽寺
九死難忘歇醒樓
不用更臍高處望
金剛眞面已全收
不可形容不可思
群巒只足强名之

노승의 금강산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사실 하루에 암자와 봉우리 하나씩만 이야기한다 해도 일만이천 봉에다 팔만구 암자이니 몇년을 해도 다함이없을 것이었다.

청학봉 밑 금강문(金剛門)에서부터 시작되는 만폭동에 있는 못(潭)만 해도 그랬다. 내금강의 수백 개나 되는 계곡 물줄기가 모여 장관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만폭동.

“만폭동만 해도 그렇지. 만개의 폭(瀑)이 있으니 만개의 암(岩)이 있고,만개의 담(潭)이 있고, 만개의 성(聲)이 있는 것이야.”

그러니 만폭동의 못을 하나씩만 이야기한다 해도 몇년은 족히 걸릴 것이었다. 큰 못만 얘기한다 해도 비로봉 남쪽에서 출발하여 법기봉의 암벽에부딪치며 내달리다가 여덟개의 큰 못을 이루는데, 이름하여 검은 용 같은흑룡담(黑龍潭)·비파의 선율을 내는 비파담(琵琶潭)·푸른 파도 덩어리 같은 벽파담(碧波潭)·흰눈을 토해내고 있는 듯한 분설담(噴雪潭)·보석처럼아름다운 진주담(眞珠潭)·거북 모양의 귀담(龜潭)·배 모양의 선담(船潭)·화룡이 꿈틀대는 것 같은 화룡담(火龍潭) 등등이 그것이었다.

“만폭동을 지나 마하연에 다달으면 비로소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엎드려절을 하지. 뒤에는 향적불(香積佛)이 산다는 중향성(衆香城)과 늘 흰구름이오락가락하는 백운대(白雲臺)가 있고, 앞에는 법기봉·혈망봉(穴望峰)·관음봉, 왼쪽에는 칠성봉·석가봉이 엎드려 절을 하는 것 같거든. 더구나 마하연이 촛대봉 동남쪽 석대 위에 있어 더욱 그런 기분이 들지.”

마하연.

신라 문무왕 원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 금강산의 심장이 되어 온산에다 청정한 기운을 퍼뜨려주는 선찰(禪刹). 금강산의 정수리인 비로봉을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의 도량. 따라서 시인묵객보다는 금강산의맥박 소리를 듣고자 예부터 나옹선사 등 선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들었던,해발 846미터의 석대 위에 새둥지처럼 자리한 사찰인 것이다.

“금강산의 절 중에서 최초로 창건한 유점사를 가려면 내금강의 내무재령(內霧在嶺)을 넘어야 하고, 다시 고성 온정리까지 가서 10여리쯤을 더 오르면 바위들이 온갖 형상을 한 외금강의 만물상(萬物相)이 가까이 나타나고,또 극락현을 넘으면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인 신계사가 나오지.”

이처럼 노승은 운부암 선객들에게 금강산 이야기를 연극의 1막 1장처럼대충 마무리했는데, 때는 하안거 해젯날인 백중 절기가 다가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성철이 마하연에 도착한 것은 9월 초순.

운부암을 떠난 지 꼭 열이틀 만이었다. 탁발을 하면서 마하연에는 동안거결젯날 이전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쉬엄쉬엄 찾아갔던 것이다. 가는 중에 스님들을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했고, 금강산을 찾아가는 관광객들을 만나 동행하기도 했지만 성철은 혼자일 때가 가장 홀가분했다. 성철은 마하연에 도착하자마자 결제 기간이 아닌데도 선방인 만회암(萬灰庵)을 찾아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출가 전의 성철에게 〈증도가〉를 주었던 노승은 없었다.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마하연을 일년 전에 떠나 금강산의 깊은 암자로 숨어들었다는 것이었다. 대신 자신이 용성을 시봉할 때 범어사선방에서 잠시 수행을 한 자운이란 젊은 스님을 만났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이었지만 바로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따지고 보면 자운이 성철의 은사인 동산과 불법의 형제간이므로 사숙간이라 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격식을 무시한 채 도반처럼 지내기로 하였던 것이다.

“마하연에 스님들이 얼마나 있습니꺼.”
“선방인 만회암,저 위쪽의 선암,수미암의 스님들까지 합하면 80여 명쯤될깁니더.”
“도인들은 어떤 분들인교.”
“만공(滿空)스님, 석두(石頭)스님이 계시다가 떠나셨고, 지금 만회암에계시는 수월(水月)스님의 제자인 묵언(默言)스님 정도가 아니겠습니꺼.”

그런데 성철은 10월말부터 퍼붓는 눈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내금강의 눈은 한번 내리면 무릎까지 쌓였고, 그 눈을 치우려면 한나절씩이나 눈과 씨름을 해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마하연에서 선방인 만회암까지의 거리는 한마장이나 되었으므로 젊은 스님들이 며칠씩 눈을 치워야 산길이 뚫렸던 것이다.

성철은 그때마다 자운에게 불평을 늘어놓곤 하였다.

“눈 치우다 세월 다 보내겠다. 공부는 언제 하노. 내년 하안거는 다시팔공산으로 내려갈기다.”
“금강산 한철 공부가 다른 데 몇철 공부보다 낫다. 그러니 꾹 참고 있다가 여름을 나보소.”

자운의 얘기는 눈을 치우느라고 동안거 공부는 망치겠지만 내년 하안거가있으니 참아보라는 것이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성철이었지만 이때나이후나 자운의 설득에는 왕고집을 굽혔다. 그러니까 성철이 마하연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다음해 하안거까지 버틴 것은 순전히 자운의 권유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하안거 중에 강 보살이 또 찾아와 성철을 만나고자 하는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때 성철의 왕고집을 꺾은 사람도 자운이었던 것이다.

자운이 성철을 불러 하소연을 했다.

“이보소, 철수좌. 어무이 보살한테 돌멩이를 던졌다는데 사실인교. 이런불효가 세상에 어딨는교.”

선방 수좌한테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운은 차분하게 묻고 있었다. 그 수좌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때 성철은 만회암에서 네 마장쯤 떨어진 백운대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강 보살이 그곳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성철이 구름 자락들이 걸려 있는 낭떨어지 쪽으로 물러서며 소리쳐도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손에 잡힌 돌멩이를 던진 사건이었다.

“자운스님도 `세속은 윤회의 길이요, 출가는 해탈의 길'이란 말 들었을깁니더. 황벽 희운 선사의 어머니 얘기도 들었기고.”

물론 자운도 성철이 말한 희운 선사의 어머니 얘기를 잘 알고 있기는 했다. 중국승 희운 선사의 얘기는 이러했다.

희운 선사가 수천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황벽산에서 수행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던 그의 노모가 고승이 된 아들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희운 선사는 물어물어 찾아온 노모에게 물 한모금도 주지 말라고 대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에 노모는 기가 막혀 아무 말 못하고 돌아가다가 대의강(大義江) 가에서 배가 고파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그날 밤 희운 선사의 꿈에 나타났던 노모의 애절한 말은 이런 것이었고.

“내가 너에게 물 한모금이라도 얻어 먹었더라면 다생(多生)으로 내려오던 모자의 정을 끊지 못해서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쫓겨나올 때 모자의 깊은 애정이 다 끊어져서 그 공덕으로 죽어 천상으로 가게되니 너의 은혜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운은 성철의 마음을 움직여 강 보살을 만나게 하였다. 선방 조실스님의 간곡한 법문도 사실은 자운의 부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철수좌. 자기를 낳아 길러준 가장 은혜 깊은 부모가 굶어서 길바닥에엎어져 죽더라도 눈 한번 거들떠보지 않는 무서운 마음, 이것이 수행자의결심이네. 허나 이러한 마음도 방편일 뿐, 방편에 걸려서는 견성을 이룰 수없는 법이야. 그러니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장애를 시험 해보시게. 어머니보살을 업고서도 화두가 순일한지를. 만약 화두가 순일하지 않거든 아직 공부가 덜 된 줄 알게.”

이렇게 해서 성철은 선방 수좌들이 떠미는 바람에 강 보살을 일주일 동안이나 업고 마하연 부근을 다녔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자면 강 보살에게 효도관광을 시켜준 것이었다
.
성철이 강 보살을 업고 맨 먼저 간 곳은 백운대 옆의 샘인 금강수(金剛水)였다. 온갖 병에 영험이 있다 하여 약수 중에 약수로 쳐주는 금강수의샘물이었다. 그 다음은 다 쓰러져가는 선암(船庵)·수미암(須彌庵)을 올랐다가 내려왔고, 또 그 다음 날은 중향·백운대 방면으로 한번 더 갔고, 이틀을 쉰 뒤에는 금강산 일만이천봉 중에 으뜸 봉인 비로봉을 오르다가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와 내려오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강 보살을 업고 다닌 체험은 성철에게 수행승으로서 자신감을 준기회가 되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시종 화두가 순일하였으므로강 보살을 업거나 업고 있지 않거나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운스님, 아무래도 마하연의 겨울은 네게 맞지 않은기라.”
“금강산에서 여름 한철 깊이 공부했으니 알아서 하소.”

이때 자운은 성철의 공부가 잘 익어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만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철이 다시 팔공산의 동화사로 내려온 것은 1940년 그의 나이29세 때였다. 이때도 성철은 선방인 금당선원으로 바로 들어가 참선에 몰입하였다.

그러던 중이었다. 출가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몽중일여에서 숙면일여(熟眠一如)의 경지로 더 나아가 깊은 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화두를 본것이었다. 그때 마음 속의 본래 성품을 보게 된 법열을 향기로운 꽃망울처럼 터뜨리며 시로 읊조리는데, 이른바 오도송이었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로되 흰구름 속에 섰네.
黃河西流崑崙頂
日月無光大地沈
遽然一笑回首立
靑山依舊白雲中

일찍이 스승 동산이 당부했던 길 없는 길, 문 없는 문의 경지로 나아가부른 깨침의 노래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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