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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禪師 思想과 見性탐구 14 - 황벽의 心要와 自性의 가치

기자명 종호 스님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心卽是佛의 마음이 곧 無心
自性은 인이 가진 무한의 능력

마조와 백장의 전통 조사선을 계승한 인물이자 선의 거장 임제의현을 배출시킨 당대의 걸승이 황벽희운이다.

과격하면서도 당당한 언행 뒤로 선의 풍광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황벽의 선세계에는 인간 실존에 대한 심원한 통찰력과 따뜻한 인간 이해의 마음이 깊이 배어있다. 《전심법요》와 《완릉록》에 나타난 황벽의 심요도 이에 바탕해 있으며, 그것은 심지법과 그 체득으로 요약되고 심지법의 핵심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심즉시불(心卽是佛), 나아가 무심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음을 문제의 중심으로 보는 것은 선의 기본이자 특색이다. 황벽은 이런 심즉시불을 자신의 사상적 요체로 삼으면서 마음이 부처이고 마음 이외에 다른 절대적 가치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붓다를 외재적 존재나 초월적 절대자가 아니라 현실의 한 가운데에 살아있는 인간의 실천적이며 주체적인 인격 그 자체로 보면서 모든 인간의 실존 그대로가 본래불이라는 선불교의 근본정신, 곧 인간성 회복에 대한 대선언이다. 그야말로 부처와 일체중생의 근원적 심성을 꿰뚫어보고 그 절대적 동질성을 설파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심즉시불을 중생의 현상사적 측면에서 풀어보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고통과 행복이 나눠진다는 단편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처의 용심을 하면 부처의 삶이 이루어지고 중생의 용심을 하면 중생의 세간사가 나타나므로 마음을 부처와 같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차원적 이야기이다.

삶과 죽음이 항상 숙명적인 카르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존재와 가치를 결정해가는 보다 근원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면 삶은 항상 중생사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단순히 용심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치열한 내면의 응시를 통해 각득된 깨달음이 있어야만 결정적인 순간에 필연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황벽은 이를 무심이라고 하고 있다. 즉 심즉시불의 마음은 무심인 것이다.

황벽은 '궁극적인 것은 무심이다. 무심이 심요, 곧 심법의 요체이다'고 설한다. 그러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 한사람의 무심도인에게 올리는 공양만 못하다고도 말한다. 무심자에게는 일체의 사념,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라는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모든 문제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생각은 응당 분별로 이어지고 분별은 집착을 낳으며, 집착은 영원한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한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바로 존재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분별의 무심, 갠지스 강의 모래알이 붓다나 거지 그 누가 밟던, 향료나 오물등 무엇이 묻던 기뻐하거나 싫어함이 없는 것처럼 오직 무심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범부가 집착하는 현상이나 도인이 집착하는 본질에 대한 것, 그 모두에서 벗어나야만 참으로 무심일 수 있는 것이요, 현상경계에 따라 흐르는 의식으로 기쁨과 슬픔을 좇는다면 단지 중생의 속사(俗事)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참으로 무심일 때, 언어와 침묵, 옳음과 그름, 정신과 물질, 부처와 중생이 모두 하나인 세계, 만 가지 생명이 모두 개개의 부처로 현현되는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자성의 존재에 의해 가능케 된다. 자성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인간 내면의 잠재력이자 스스로가 무애자재의 삶을 구현하게 하는 가능성의 존재이다. 인간이 가진 무한의 능력, 그것이 바로 자성이다. 삶의 고통을 끊어내는 것도, 무분별의 무심을 이뤄 영원한 자유를 얻는 것도 모두 자성에 의해 가능하다. 자성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 있다.

'중생 속에 자성의 내재'와 같은 상반된 가치의 절대적인 동일성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이를 확인하고 실체화시키거나 신비화시키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황벽의 심즉시불은 그 접근을 쉽게 해준다. 마음을 핵심으로 여기면서도 그것을 강을 건너는 뗏목으로 여길 수 있을 때 무분별 무집착의 무심이 가능케 되며, 무심이 이루어졌을 때 정견이 나타나 상대성을 떠난 절대 대자유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자성의 힘이다. 인간이 가진 무한의 가능성, 그것이 바로 자성이기 때문이다.


종호 스님/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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