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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를 찾아서 11 - 임종게 上

기자명 김종만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입적 직전 빚어내는 함축된 禪律

마지막 순간에도 喝과 棒 무색한 선지 가득
生死 초월한 경지 설파 輓詩와는 거리 멀어

죽음의 본능(death instinct)을 제거하고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 열반의 일반적 해석이다. 따라서 선사들, '깨친 이'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삶'의 출발이다. 다시말해 선사들의 죽음은 사바세계의 육신을 벗고 불멸법신(不滅法身)을 구가하는 축제다. 그렇지만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선사들의 죽음은 범상하지 않다. 분명 축제긴 한데 선사들에겐 이마저도 거추장 스럽다. 평소 밥먹고 차마시며 오줌누듯 죽음을 그렇게 맞아들인다. 선리(禪理)를 체득한 선사일수록 죽음을 맞는 자세가 평범하기 이를데 없다.

대부분의 열반시(涅槃詩) 또는 임종게(臨終偈)는 저마다 체득한 선리를 일깨우고 있다. 비록 고요함으로 가는 〔入寂圓寂〕 절차이긴 하나 그들이 남기고 간 열반시엔 다른 선시와 마찬가지로 할(喝)과 방(棒)을 무색케 하는 무서운 선지가 담겨있다. 거기엔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나 만시(輓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생사를 초월한 시적 아름다움을 어찌 그리 아름답게 빚어낼 수 있을까 하는 감동의 여운만이 짙게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우선 초기의 임종게를 한 수 음미해보자.

육체는 내 것이 아니요
오온 또한 내 소유가 아니네
흰 칼날 목에 와 번뜩이나니
그러나 봄바람 베는 것 그와 같아라.

四大非我有 五蘊本來空
以首臨白刀 猶如斬春風

이 임종게의 주인공은 승조(僧肇 383∼414)다. 구마라즙 문하의 수제자로 역경사업에 종사하며 많은 공로를 남겼다. 지겸이 번역한 《유마경》을 읽고 불교에 귀의했는데 관리가 되라는 왕의 명령을 몇차례 거역하자 처형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 임종게는 처형당하기 앞서 읊은 것으로 죽음을 초월한 한 구도자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 젊은 혈기가 아직도 왕성할 즈음 죽음을 맞는 그의 자세는 '봄바람'처럼 평온하다. 솔직히 카톨릭의 젊은 신부 김대건이 순교할 때와 비교되는 장면이다. 김대건이 망나니의 칼질에 두려워 하지 않고 목을 더 길게 뺏다고 전해지듯 승조 역시 '흰 칼날이 목에 와 번뜩이는 순간'에도 평안을 유지하며 태연자약할 수 있었던 것은 4대의 육신은 내 것이 아니라는 불교의 진리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칼날은 가아를 벨 수 있지만 '참나'를 단도할 수는 없다. 승조는 '목을 베기 위한 칼날'을 '봄바람 베는 것'에 비유하며 죽음의 극적 상황을 오히려 '미적 구도'로 전환시키고 있는데 목을 길게 빼고 있는 김대건의 작의적 상황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가의 죽음은 삶과 다르지 않은(生死不二)데 있기 때문이다.

선사들은 대개 자기의 '갈 날'을 미리 알고 있다고 한다. 다음의 임종게는 후대 열반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열반시의 한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시다.

금년에 나의 나이 예순 일곱
늙고 병든 몸이 연따라 살아가되
금년에 내년의 일 기억해두라
내년되면 오늘의 일 기억나리라.

今年六十七 老病隨緣且遣日
今年記取來年事 來年記著今朝日

임제종의 대종사 수산성념(首山省念 926∼993)이 임종을 1년 앞둔 12월 4일 대중을 모아놓고 설한 게송이다. 내년이 되면 오늘의 일이 생각날 것이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모두 어리둥절했다. 이듬해 12월 4일 시각도 어김없는 오시(午時). 그는 대중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한다. 이 뒤를 이어 설한 것이 다음의 게송.

백은세계의 금색의 몸에서는
유정 무정도 하나의 진여
명암이 다할 때엔 함께 안 비추나니
해가 정오 온뒤에 전신을 보이노라.

白銀世界金色身 情與非情共一眞
明暗盡時俱不照 日輪午後示全身

선사의 품격을 유지하며 대중들에게 교시하고 있는 이 시는 평생의 선리를 함축해 단 한번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수산이 비록 임제종의 법맥을 이었다고는 하나 임제종이 다른 종파의 설시를 비교적 편견없이 대했고 그런 가풍이 수산으로 하여금 조동종의 오위정편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던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게송이 바로 이것이다. '금색신'은 최상의 황금에 비유되는 부처님의 몸을 말하는 것으로 진여야 말로 부처님의 본신이라는 의미다. 즉 내용적으로는 본래자성청정신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명암의 문제를 깊이 파고 든 것은 조동종. 이는 참동계를 지은 석두희천 이래의 전통이다. 명은 밝은 대낮에 삼라만상이 각각 제 모습을 드러내니 차별적 현상계라 하여 편위(偏位)라고 하고, 암은 어둠 속에서 모두 무로 돌아가니 평등의 진리 자체를 나타낸다고 해 정위(正位)라고 한다. 수행이 진척됨에 따라 평등과 차별의 갖가지 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단 이 둘이 원융되고 마침내는 그 원융의 관계마저 스러져 흔적도 남지 않는다면 그 자리가 바로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수산은 이러한 경지를 설파하고 있다. 그러면 그에게 자신의 죽음은 어떤 뜻을 지니는가. 선객들이 애용하는 말에 일륜당오(日輪當午)가 있다. 해가 정오에 와 있다는 것이어서 이 순간은 어떠한 사물도 그림자없이 광명 밑에 놓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수산은 '일륜오후'라 해 '일륜당오'마저 벗어난 시간, 깨달음의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경지에서 그의 열반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산의 임종게는 훗날 보본혜원(1037∼1091)과 부용도개(1043∼1118)에서도 비슷한 류의 열반시를 남기게 하고 있다. 먼저 보본혜원의 임종게.

쉰다섯 해 환영의 이 육신이여
사방팔방으로 쏘다니며 뉘와 친했던고
흰구름은 천산 밖에서 다하고
만리 가을하늘엔 조각달이 새롭네.

五十五年夢幻身 東西南北孰爲親
白雲散盡千山外 萬里秋空片月新

이미 이러한 류의 열반시가 적지 않게 나왔다는 점에서 독창성은 떨어진다는게 대체적 평가다. 그러나 운과 율등 시가 가져야 될 기본요소 및 시어의 선택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에서 시적 품격은 높다고 말해진다. 또한 이러한 형태 및 서술은 계속 후대로 이어지고 있어 열반시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부용도개의 임종게는 형태는 비슷하나 죽음을 맞아서도 두둑한 배짱을 내보여 눈길을 끈다.

내나이 일흔여섯 세상인연 다했네
살아서는 천당을 좋아하지 않았고
죽어서는 지옥을 겁내지 않네.

吾年七十六 世緣今已足
生不愛天堂 死不ㅋ地獄

삶과 죽음에 미련이나 두려움따위는 안중에 없다. 선리가 다소 떨어지는게 흠이긴 하나 두둑한 배짱은 선사의 기백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그 기백이 너무 강렬해 정치(精緻)한 선리가 오히려 해가 될까 걱정된다. 이로써도 선시의 매력을 충분히 던져주고 있다는 것이다.


김종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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