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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이야기 16 - 三更

기자명 법보신문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산승은 깊어가는 밤을 사랑한다

추풍(秋風)에 애타도록 읊어보아도 / 세상엔 알아줄 이 하나 없구나 / 창 밖엔 삼경(三更)인데 비가 내리고 / 등불 앞엔 만리(萬里)를 달리는 마음.

신라 때의 고운 최치원이 쓴 시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깊은 가을밤의 한없는 적막과 고독감이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지난 세월 뒤돌아보면 산사가 가난했을 때 산승의 마음은 더없이 풍요롭고 행복했다. 지폐 한 장 몸에 지닐 수 없었던 가난, 오직 하루 세 끼의 공양 앞에 합장하고 감사를 올리던 시절에는 밖으로 마음 빼앗길 일이 없었다. 참으로 무소유의 맑은 몸.

그 대신 산승은 안으로의 풍요로운 낭만과 정서를 간직하는 여유를 가졌다. 하늘의 구름, 새소리, 흐르는 물소리, 짙푸른 나뭇잎, 가을의 낙엽, 겨울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 돌 하나에도 정을 주며 친구로 불러들였다. 산승의 마음속에는 자연의 소리가 가득 살고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산사에 고요한 어둠이 밀려오면 산승의 방에는 까물거리는 불빛이 켜지고, 뒤이어 곧 산을 덮어버린 짙은 어둠 속에서 소쩍새의 울음은 밤을 더욱 깊고 적막하게 만든다. 어두워야 할 때 한없이 어둡고 적막해야 할 때 더없이 적막한 산사의 밤이야말로 인생은 뼈아프게 홀로임을 일깨워준다. 참으로 고독하다. 그러나 이 고독은 자아의 발견이며, 밤의 적막을 배경으로 했을 때 더욱 선명하다. 이렇듯 자기 내부로 향한 고독의 눈을 뜰 때 영혼에서는 향기가 난다. 이렇게 밤이 점점 깊어갈 무렵 그 두꺼운 적막을 깨고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땡 … 땡 … 땡 … 세 번 허공으로 사라진다. 밤 9시. 산중에서 알리는 삼경은 시간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밤의 깊이를 알리는 것이다. 일찍 어둠이 깔리는 가을이나 겨울철의 9시는 깊은 밤이다. 아무튼 내일 새벽 3시에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잠자리에 들라는 알림이다.

그러나 산승은 깊어가는 밤을 사랑한다. 낙엽이 지는 가을 밤에 나와 하늘의 맑은 별을 올려다보면 명예나 권력이나 재물 따위는 다 나뭇가지를 스쳐가는 바람과 같아진다. 함박눈이 소리없이 쌓이는 겨울의 긴긴 밤에 촛불 한 자루와 마주 앉았노라면 항상 비워둔 의자에 고독이 ㅊ아오고, 산승은 그 고독과 함께 사념의 먼 여행을 떠난다. 마음이 가난했던 시절의 밤은 자기 영혼의 고독한 소리를 듣는 시간이었다.

또 짧은 여름밤 산사의 창호지로 환하게 흘러드는 달빛을 두고 어찌 그냥 잠을 청할 수 있으랴. 산승은 삼경이 지난 뜨락을 내려 달밤을 홀로 거닐면 이 비어있음의 충만함에 더없는 행복에로 젖어든다. 달밤의 적막에 귀와 눈을 갖다 댄다.

깊은 밤, 나와 함께 흐르는 물소리 … / 훤한 달빛 타고 산협을 돌아 사라지는 먼 물소리뿐 / 부엉이도 잠든 연화봉은 노인처럼 앉아 있었다 / 그 위로 유성이 찬란한 금을 긋고 흐른다 / 이따금 / 대숲을 지나는 미풍에 달빛이 얼룩질뿐 / 가랑잎 하나 지지 않았다 / 수정빛 정기 감도는 빈 산허리 / 모든 보이지 않는 움직임들이 / 깊은 정적에로 쌓여가고 있었다.

이렇게 삼경이 지나 깊어 가는 산사의 밤을 홀로 거닐다보면 가장 선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의 마음속에는 시심의 물결 소리로 가득하다. 고독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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