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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신앙의 고향 6 - 포천

기자명 이학종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반월산 후미진 곳에 궁예미륵 모신 뜻은?

궁예와 미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미륵을 이야기하다 보면 곧 궁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 가히 운명적 관계라고 해도 좋으리라.

궁예, 그는 어떤 인물일까. 익히 알려진대로 포악하고 흉칙한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기층 민중들을 규합해 미륵의 새 세상을 건설하려던 미완의 혁명가이자, 미륵의 화신인 것일까. 어쨌거나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들은 외려 궁예라는 인물에 천착하게 하는 고리가 되고 있으니, 이래 저래 궁예는 알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물인 것이다.

궁예가 나라를 세워 도읍으로 정했던 철원, 그리고 근접한 포천 땅에 가면 아직도 궁예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궁예의 비원이 좌절된 땅이 곧 철원이요, 파주인 것이니 이곳에서 궁예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곳 철원과 포천는 오늘에도 분단의 상처를 잔뜩 머금은 회한의 땅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궁예미륵을 찾아 떠나는 나그네의 발길은 불현듯 찾아드는 비감과 뒤섞여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궁예는 원래 신라 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헌안왕이라고도 하고 경문왕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단옷날(음 5월 5일)에 태어난 그는 날 때부터 이(齒)가 나고, 이상한 광채가 나타나 장차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는 일관(日官)의 말을 믿은 왕이 죽일 것을 명했지만, 유모와 사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고, 후에 세달사로 출가하여 선종(善宗)이라는 비구가 되었다. 당시 신라의 왕실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지방에서 호족들이 득세를 하던 중 흉년이 들어 국고가 탕진되자 세금을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궁예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호족이었던 기훤의 부하로 들어가 뛰어난 전적을 올리며 마침내 장군이 되었고, 독자 세력을 형성해 왕이 되었다. 파죽지세로 세력을 키워나가며 방대한 지역을 다스리게 되자 고구려의 재건을 호언하면서 태봉국을 세우고 왕이 되어 스스로 미륵을 칭하며 28년간 나라를 통치했다. 그러나 왕건을 추대하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에게 축출되어 변복차림으로 도망을 치다가 지금은 휴전선 윗쪽의 북한 평강의 갑천에서 피살당했다."

궁예의 일생은 이렇듯 파란만장하게 점철됐다. 궁예에 관한 역사의 기록은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아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이고, 신하와 백성을 마구 살해하면서 마침내 민심을 잃게 돼 축출된 것으로 되어있다. 미신적인 불교를 신봉했고, 스스로 지은 20여권의 불경들도 그 내용이 요망하여 부처님의 뜻에 어긋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후고구려를 세워 미처 국내를 통합하기도 전에 갑자기 혹독한 폭정을 펼쳐 원망과 비난을 샀고, 도적의 무리로 출발한 탓에 세력의 기반이 미미하고, 국가 운영의 경륜이 부족해 신라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급기야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하면서 유교적 정치이념과 선종의 승려 및 6두품의 지식인층까지 두루 포섭하였던 왕건에 의해 축출된 것으로 역사는 그를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역사의 기록이란 이긴 자의 기록인 것일진대, 궁예에 대한 이같은 혹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 터.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한 것은 미신이라기보다 혼탁한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그만큼 강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은 아닐까. 20여권의 경전을 저술한 것은 오히려 그의 불교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포악하고 의심이 많았다는 기록 역시 초적(草賊)의 무리를 근거로 건국을 하다보니 강력한 세력기반이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자위권 차원에서 기득권층을 세력기반으로 한 토호들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어쩌면 이는 신라 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초적의 무리와 호족세력이 연합전선을 구축했으나, 건국 후 세력이 비대해지면서 개혁지향의 초적세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호족 간의 갈등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리라.

갖은 망상 속에 나그네는 도읍이었던 철원에서 토호세력, 다시 말해 기득권 세력의 지지를 받은 부하 왕건에 의해 축출된 궁예왕이 회한을 품은 채 쫓기던 땅 포천에 외로이 서 있는 궁예미륵을 찾아 떠난다. 쫓기던 궁예가 지지세력과 함께 산성을 쌓고 결사적인 항전을 했다는 포천 구읍리의 반월성터와 산정호수 옆의 명성산(鳴聲山), 철원땅, 그리고 현등산 일대를 돌아보며 그 옛날 궁예의 진면목을 더듬어 찾아보리라는 생각으로.

포천 사람들에게 몇 차례를 물은 끝에 반월성터에 도착했다. 돌로 쌓은 성곽 위에 올라보니 포천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형이 가파른 것이 자위(自衛)를 위한 전장터로는 최적격이다. 작지만 험준한 산 반월성터, 군데군데 제법 큰 밤나무가 즐비하고,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이젠 고목이 된 활엽수들이 인상적이다. 패망한 자의 슬픔을 상징이나 하듯 산등성이와 능선에는 가시덩쿨과 쑥대가 널려있다.

반월성터를 돌아보고 성터 옆쪽으로 후미진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 외로이 서있는 궁예미륵을 찾아 한 길 크기의 무성한 들깨가 빼곡이 들어찬 밭으로 향했다. '저기 있다!' 바람에 일렁이는 깻잎 새로 슬쩍 모습을 드러낸 궁예미륵을 보고 모른 새 탄성을 질렀다. 들깨를 헤치고 가까이 다가갔다. 오랜 세월 풍화에 찌들린 모습, 얼굴은 형태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마모됐고, 코는 아예 깊게 패였다. 남아있는 석질도 손길이 닿으면 곧 부서질 정도로 푸석푸석하다. 그러나, 천년의 비바람도 궁예미륵의 기상을 아주 삼켜 버리지는 못했으니, 당당한 위풍의 딱 벌어진 어깨는 그 옛날 산천을 휘달렸을 궁예의 기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허리부위 아래는 땅 속에 묻혀 있어 미륵이 주재하는 새 세상을 염원하는 민초들의 애 타는 염원을 나타내고 있고.

그런데, 왜 민초들은 반월성 안쪽이 아닌 능선 아래 왼편 마을 후미진 곳에 궁예미륵을 만들어 세웠을까. 궁예가 죽은 지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세웠을 이 미륵을 성안이 아닌 아랫마을 뒤쪽에 조성했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궁예가 죽은 뒤에도 궁예와 그를 따르는 부하, 그리고 궁예와 함께 새 세상을 일구려던 민초들은 언젠가는 미륵의 세상이 올 것임을 믿고, 그 비원을 이 궁예미륵에 담았을 것이리라. 그러나 궁예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高麗)에서 당당하게 성내에 미륵상을 세우는 것은 자칫 화근이 될 우려가 있어 이 후미진 곳을 정해 몰래 궁예미륵을 세운 것은 아닐런지.

사실 궁예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어 쫓겨갔다는 역사의 기록대로라면 어떻게 많은 민초들이 마지막까지 그를 따르며 산성을 쌓고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미륵에 서원하고 민초들도 더불어 잘사는 이상적인 꿈을 펼치려 했던 궁예를 모든 민중들이 외면했을 리는 없을 것이리라.

호족세력들에게 밀려 철원을 빠져 나온 궁예는 도피안사를 거쳐 보개산의 보가산성, 태봉산 성터, 산정호수가 펼쳐져 있는 명성산과 반월산 성터에 이르기까지 퇴각을 거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명 울음산으로 불리는 명성산은 궁예와 그의 부하, 그리고 따르는 민초들이 미륵세상의 꿈이 좌절된 것을 슬퍼하여 목놓아 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던가. 어쩌면 산정호수의 저 깊고 푸른 물은 궁예와 민초들이 흘린 회한의 눈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얽힌 역사의 질곡과 선조들의 비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볼이 발그라이 상기된 청춘남녀들은 오리모양의 배를 타고 은애(隱愛)의 열락을 만끽하기에 여념이 없다.

궁예는 반월성에서도 쫓겨난 후 현등산을 거쳐 지금은 휴전선 북쪽에 위치한 평강(平康) 땅까지 패퇴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평강읍 서쪽의 갑천(甲川)이라는 곳에는 왕건에 쫓긴 궁예가 갑옷을 벗어버린 곳이라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광개토대왕에 의해 당시 고구려에 편입되었던 평강 땅이 고구려의 옛 영화를 재현하려던 꿈을 펼쳤던 궁예왕이 죽어간 장소가 된 이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마도 호족세력에 쫓기던 궁예가 자신의 못 이룬 비원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광개토대왕의 인연지인 저 평강 땅을 굳이 자신의 회향지 정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나그네는 쫓기던 궁예가 몸을 씻은 후 잠시 쉬어갔다는 현등산 인근의 무지개 폭포를 찾지 못한 채 귀경을 서두른다. 서울로 향하는 경춘국도 옆으로 도도히 흐르는 북한강을 바라보았다. 역사의 구비에서 마다 꺾여지곤 했던 안타까움이 불끈 솟구쳐 올랐다.

"그 때도 흘렀을 테지.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에 의해 대국 고구려의 꿈이 좌절됐을 때도,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의해 후고구려의 꿈이 또 다시 무산됐을 때에도, 이 혼란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저 강은 저렇게 눈물이 되어 흘렀을 테지 …."


글 =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사진 = 황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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