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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 구산 대선사 하

기자명 이학종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龍吟霧起 虎嘯風生으로 보조가풍 진작

혈서로 淨化당위성 역설 '위법망구' 보여
"가부좌틀고 갈란다" 生死초월의 경지 구현

"세상이 온통 모양으로, 형식으로, 돈과 명리를 탐하는 추세로 살아가는 이 말세에 고집스럽고 철저한 스님으로, 당당한 선사로, 하고 싶은 소리를 다하고,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마치고 스스로 가는 날을 정해 놓고 앉아서 웃으며 가신 스님! 사내 대장부로 한 세상을 왔다가 이보다 멋지게 장하게 거룩하게 살다 갈 수가 있습니까? 스님의 가심에 수많은 불자들이 오열하는 것은 위대한 스승을 잃은 슬픔에서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아쉬운 사람, 그리운 사람은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제 가락 제 멋으로 살아가는 당당한 사람입니다. 자기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남을, 이웃을, 중생을 위해서 함께 울고 웃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이상적 사표이신 스님을 우리는 마침내 떠나 보내었습니다. 스님은 오늘도 진흙 속에 허덕이는 우리를 놓아두고 마침내 가셨습니다. 스님! 스님은 좋으시겠습니다. 스님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구산(九山)이 입적에 들자 그의 사제이기도 한 박완일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은 장례식에 참석, 다시 듣기 어려운 애도사를 읊었다. '(이렇게 열반에 드시니) 스님은 좋으시겠습니다'라는 박 회장의 걸림 없는 애도사도 애도사려니와, 참석자 누구도 이를 두고 불경(不敬)하다거나 지나치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런 경우는 나고 죽음이 둘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간 구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리라. 어쨌든 박 회장의 이 애도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

박 회장의 애도사 내용처럼 구산은 하고자 한 일을 모두 다 마치고 웃으면서 입적에 든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구산의 일생에 대해 '멋지고, 장하고, 거룩하게'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생전 구산이 머물고 있던 조계총림 송광사에는 많은 선객들이 몰려들었다. 국내는 물론이요, 미국과 유럽 등에서 온 벽안의 승려들로 도량은 늘 넘쳐흘렀다. "한국불교의 동량을 양성하라."는 은사 효봉 화상의 유훈을 구산은 한 치의 어김없이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송광사는 한 해가 다르게 명실상부한 승보종찰(僧寶宗刹)로 변모해갔다.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치되던 해(1969년)에 총림의 후원단체인 불일회(佛日會)가 전국적인 규모로 창립되고, 이듬해 삼월 삼짓날 수선사가 낙성되는 등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 가장 뚜렷하게 중흥의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구산은 1973년 미국 삼보사 개원법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께 데리고 온 미국인 제자 등과 불일국제선원을 개원하니, 세계각국에서 온 푸른 눈의 납자 300여명이 동참해 말 그대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구산이라는 한 걸출한 선지식이 있어 이처럼 희미해져 가던 호남의 불교에 새 기운이 솟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일러 용음무기 호소풍생(龍吟霧起 虎嘯風生), 즉 용이 읊조리니 안개가 자욱하게 일고 호랑이가 울부짖으니 바람이 이는 격이라고 칭송했다. 이는 구산의 도풍(道風)이 크고 높아 많은 수행자가 운집했다는 뜻이다.

정화불사가 한창이던 1954년 하안거(夏安居)가 마악 끝났을 무렵, 조계사에서는 전국에서 몰려온 비구승들의 승려대회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 순간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몰려와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할 수 없다며 저지했다. 일부 과격한 비구들이 혈서를 쓰고 몸싸움을 벌이면서 법당 안은 일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때 분연히 일어나 정화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500자 분량의 혈서를 써 내려가는 한 비구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구산이었다. 얼굴은 동안(童顔)이었지만 번뜩이는 안광을 한 그가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혈서를 낭독해 내려가자 법당 안은 순식간에 눈물 바다가 되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벽력같은 고함은 아니었지만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호하고 낭낭한 목청은 위법망구의 사자후가 되어 정화에 동참한 대중들의 가슴마다에 뜨겁게 울렸던 것이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 5년여에 걸친 운수행각을 마친 구산이 정각토굴에서 무섭게 정진에 들었을 때의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는 그의 불가사의한 면을 보여주는 일화다.

구산은 자신의 수도처로 호랑이 굴 옆을 선택했다. 끈질기게 붙어다니며 떨어질 줄 모르는 졸음(睡魔)을 내쫓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잡념을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호랑이굴 옆을 고른 것. 그는 그곳에서 3년 가량, 그러니까 1000여 일을 홀로 정진하며 식량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억척을 보였다. 토굴 근방에 채마밭을 갈아서 곡물을 생산해 양식으로 삼았다. 그러나 수확기만 되면 이따금씩 집채만한 산돼지를 비롯해 각종 산짐승들이 채마밭을 파헤치며 양식을 먹어 치우는 일이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몽둥이를 들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산짐승들이 채마밭을 헤집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여느 날처럼 몽둥이를 들고 고함을 치며 밭으로 내달았다. 그런데 작은 산짐승들만 도망을 쳤지만 정작 집채만한 산돼지는 힐끗 돌아본 후 계속 버티고 서서 곡식을 파먹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구산이 난감한 지경에 빠져 머뭇거리는 순간, 참으로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토굴 옆 호랑이 굴에서 커다란 호랑이가 돌연 나타나더니 포효를 하며 달려가 산돼지를 쫓아 보낸 것이었다. 이 호랑이는 이후로도 정진을 마칠 때까지 구산을 돌보며 깨달음을 얻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장차 선지식이 될 수행자임을 알아 챈 호랑이가 지극정성으로 시봉을 한 것이었으니, 무소가 부처님을 시봉한 것에 비길만한 것이라 할 것이리라.

구산은 생활불교를 강조했다. 불교가 절집 안에서만 머물고 정작 사회에 나가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생명력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늘 걱정했다. 이러한 그의 소신은 '칠바라밀 요일'이라는 독특한 신행체계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우리 생활이 언제나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의 일주일을 막연하게 보내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할 것, 즉 목표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나'라고 하는 정의와 한계와 가치와 의무를 알고 올바른 길을 택하여 환상의 굴레를 벗고 진실한 희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생활불교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산은 신도들에게 '월요일은 베푸는 날, 화요일은 올바른 날, 수요일은 참는 날, 목요일은 힘쓰는 날, 금요일은 안정의 날, 토요일은 슬기의 날, 일요일은 봉사의 날'로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참된 자기를 깨달을 수 있고, 자리이타의 보살행으로 이 세상을 불국토로 건설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새도 진리를 노래하거든 하물며 사람으로서야 어찌 찬란한 민족문화를 자랑하는 나려후손(羅麗後孫)의 긍지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 문화와 우리 것에 대한 구산의 관심과 사랑도 각별한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 문화를 소홀히 하고 서구문물만을 맹목적으로 좇는 풍토를 비판하곤 했다. 아마도 이런 관심은 당시 스님으로서는 드물게 외국을 자주 방문했던 터라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던 데서 기인한 것이었으리라. 어느 날 구산은 법문을 통해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때 타고 온 300톤 미만의 배, 그리고 상륙해서 처음 밟았다는 사각형의 돌을 길이 보존하기 위해 보호시설을 만들어 정성껏 전승해 가는 서양인들의 문화를 지키는 자세, 다른 나라에 가서 살더라도 거실에 반드시 모닥불 화덕을 설치하는 등 자기 문화를 고수하는 태도 등 서양인들의 문화인식에 비해 과연 우리 국민은 우리 문화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되묻는 일갈을 하기도 했다. "서양의 문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바탕 위에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주체적인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문자를 멀리하는 여느 선승들과는 다르게 구산은 '석사자(石獅子)'와 'Nine Mountains'이라는 저술을 펴냈다. 그 역시 제자나 후학들이 경율론 삼장(三藏)을 배우려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오로지 선을 닦아 마음을 밝힐 것을 주장했으면서도 문자로 된 저술을 낸 것이다. 구산이 저술을 펴낸 것은 모든 중생의 마음을 깨닫도록 인도해 광명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원력의 결실이었다.

'석사자'에 실린 내용은 국내외의 방문객들을 상대로 구산이 즐겨 다루던 수시설법(隋時說法)을 엮은 것으로 역대 선사들의 상당법어와는 달리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격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바른 길을 열어 보이려는 그의 단심이 이 책 속에 가득 담겨 있다. 'Nine Mountains'은 조계총림 국제선원에서 외국의 방문객들을 맞아 설법을 할 때, 영국의 혜명, 프랑스의 혜행, 뉴질랜드의 함월 등 외국인 제자들이 통역한 내용을 묶어 책으로 낸 것이다. 이 책은 발간 후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동양철학과 불교학을 공부하는 선학자(禪學者)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후학이나 재가불자들이 법(法)을 물으러 오면 언제나 반겨 맞았다. 법에 관한 한 그에게서 문턱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간혹 언론사 같은 곳에서 인터뷰나 대담을 요청해올 경우도 흔쾌히 응했다.

당대의 선지식으로 명성이 자자한 터라 교계는 물론 일반 언론사에서도 다투어 구산을 찾았다. 그때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수행이 바탕이 된 혜안으로 청량법음을 내렸다. 그와의 대담이 보도될 때마다 많은 중생들은 감로의 법비를 맞는 기쁨을 느끼곤 한 것이다. 다음은 태평양 전쟁 희생자들의 위령재를 봉행한 후 막 일본의 오끼나와에서 귀국했을 때에 이루어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 기사의 일부. 구산의 기지와 혜안이 잘 드러나 있다.

- 영(靈)이란 정말 있는 걸까요? 만일 있다면 위령재를 지내주는 스님께 고맙다는 인사는 하던가요? "하하, 죽은 줄 알았다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려줘 고맏다더군! 영가들의 피안에 이르는 노래소리도 듣고 왔는 걸."
- 영과 마음은 둘인가요, 아니면 하나인가요? "하나 속에 여럿이 있고 여럿 속에 하나 있고. 여럿이자 하나이고, 하나이자 여럿이지(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영혼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영혼인 게지(靈卽心 心卽靈)."
- 죽고 난 뒤의 세상(來生)은 실제로 있는 걸까요? "나고 죽는 것은 본디 시작과 끝이 없거늘 금생 내생이 어디에 있어. 찰나에 구백 번의 생멸(生滅)이 있는 도리를 알아야지."
- 번뇌의 생멸이 없으면 꿈도 없다는데, 큰스님께서는 어떠신지요? "그건 내일 아침 닭이 울면 일러주지. 하하."
- 내일 일러주신다는 그 마음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산은 스스로 푸르고 물도 저절로 흐르는 것이야(山自靑靑 水自流)."
- 어떤 것이 부처님의 참모습입니까? "일체중생."
- 어째서 중생이 부처입니까? "구름 일고 물 흐르는 대지에 집집마다 달이 있고 봄볕 가득한 온 천지엔 이르는 곳마다 꽃이지(雲水大地家家月 春到乾坤處處花)."

구산은 입적에 임박해 제자들에게 자신이 좌탈입망(坐脫入亡), 즉 가부좌를 한 채 이승의 인연을 접을 것이니 관을 세로로 짤 것을 지시했다.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떠나는 선서(善逝)의 전형은 바로 이를 두고 일컫는 것이리라. 그가 입적을 한 장소는 은사 효봉 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은 곳이었다. 출가를 했던 방에서 세연을 마쳤으니 이 어찌 불연(佛緣)의 시작과 끝이 일여(一如)했던 위대한 생애의 표징이 아니랴! 장례가 치러지던 날, 구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장엄한 수천 장의 만장 중에는 벽안의 불자들이 파알리어와 영어로 된 만장을 만들어 들고 장례대열에 동참했다. 희유한 광경이었지만, 이는 국경을 넘은 그의 법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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