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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쟁론 18 - 규기와 원측의 대결

기자명 정영근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이론적 편협성 거부 중도적 유식체계 확립

원측, 유식은 깨달음 얻기 위한 방편, 교설 폭넓게 수용
규기, 삼시교판 절대적 의미 부여 배타적 우월성 주장

7세기 중엽 현장(玄ㅋ, 602∼664)이 그의 제자 규기(窺基, 632∼682)와 더불어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역출하면서, 중국의 유식학계는 구유식과 신유식으로 구별되는 일대 전환을 하게 된다. 《성유식론》은 유식학의 근본경전이라 할 수 있는 세친(世親, Vasubandu;320∼400)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호법(530∼561)의 유상유식설에 입각한 주석을 표준으로 하여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이 소의론서로 자리잡으면서 중국의 유식학계는 무상유식설을 따르는 진제(眞諦, 499∼569)계통의 구유식이 급격히 쇠퇴하게 되고, 규기에 의해 확립된 신유식이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 이 때 신유식이라는 유행과 위세에 휩쓸리지 않고, 신·구유식을 비판적으로 종합함으로써 당당히 새로운 유식학의 체계를 확립하여, 이들과 다른 견해를 피력한 사람이 바로 신라출신의 원측(圓測, 613∼696)이다. 신유식이 시대를 압도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원측의 존재는 매우 유별난 것이었고, 원측의 견해는 규기일파에게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원측은 이들로부터 심한 견제와 질시를 받았다. 원측에 대해서 도청설로 중상모략한 것이라든지, 원측의 유식설을 전하는 직접적인 저술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이들 사이의 심각한 대립양상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대립은 규기를 이어 혜소(650∼714)-지주(668∼723)로 계승되는 자은종파와 원측을 이어 도증-태현으로 계승되는 서명학파 사이에서 대대로 이어졌다. 원측의 제자 도증은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을 지어 원측의 견해를 옹호하였고, 규기의 제자 혜소(650∼714)는 《성유식론료의등(成唯識論了義燈)》을 지어 원측과 도증의 견해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들 사이의 논쟁은 후세 일본의 유식학자들에게도 관심을 끌었고, 선주(723∼797)같은 이는 《유식분량결》 등의 저술에서 양측의 사상을 균등하게 밝혀주기도 하였다.

원측과 규기의 중요한 차이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유식불교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에 있어서의 차이다. 원측은 유식불교도 불교의 여러 다른 교설들과 마찬가지로 중생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편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원측은 유식설을 중생에게 불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설명의 방편으로 채용면서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다른 교설들을 폭넓게 자신의 체계 속에 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규기는 유식불교가 부처의 가르침을 가장 잘 드러낸 최상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식불교와 다른 불교의 교설들은 잘못된 것이거나 열등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비판하며, 유식불교의 교설을 철두철미 충실하게 따른다. 이러한 차이는 구체적으로 《해심밀경》의 삼시교판과 공관에 대한 평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해심밀경》에서는 불교의 여러 교설을 설해진 순서에 따라 삼시로 분류하고, 마지막에 설해진 유식불교가 불교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드러낸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판정하고 있다. 원측은 삼시교판을 경전을 설명하는 하나의 관점이라고 상대화하여 이해하고, 이시와 삼시의 차이도 설법방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이에 대해 규기는 삼시교판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삼시의 교설사이에 내용상의 우열이 있음을 부각시킴으로써 유식불교의 배타적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원측이 교설의 쓰임에 주목하여 "중생을 인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듯이 이치에 들어가는 방법도 하나가 아니다"라고 하여, 여러 교설을 편견없이 대하는 객관적 학문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규기는 자종의 절대적 우월성을 명확히 드러내어 사람들을 자종의 가르침에 귀의하도록 유도하려는 종파적 태도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공관에 대한 평가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원측은 공관이 유에 대한 집착을 떠나게 하는 것이라면, 유식은 공에 대한 집착을 떠나게 하는 것으로서, 모두 다 중도의 바른 가르침에 해당한다고 이해한다. 이에 대해 규기는 공관을 한쪽(공의 측면)만을 알고 다른 쪽(유의 측면)은 모르는 치우친 사상이라고 평가하고, 유식만이 양 쪽을 다 갖춘 중도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유식설을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 드러나는 관심과 강조점의 차이이다. 원측은 삼성설을 중심으로 하여 유식사상을 체계화하고 있다. 이 점에서 원측은 구유식과 기본적으로 입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삼성설은 존재의 미혹한 모습(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깨달은 모습(원성실성(圓成實性))을 연기하는 모습(의탁기성(依他起性))을 기체로 하여 설명하는 것으로서, 미혹한 세계에 대한 분석(이론적 측면)과 깨달음으로의 전환(실천적 측면)을 통일적으로 추구하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규기는 팔식설을 중심으로 하여 유식설을 전개하고 있고 삼성론은 비교적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팔식설은 알라야식을 중심으로 한 식의 변화로써 현상세계에 대한 분석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유식이 현상세계에 대한 분석의 측면에 있어서 이론적으로 보다 일관되고 치밀한 사고를 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원측은 마음을 분류하고 마음에 의해서 현상계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신유식의 견해를 대부분 받아 들인다. 그래서 구유식에서 팔식위에 무구식을 세워 구식설을 주장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그 모순점과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여 논파한다. 그러나 원측은 신유식의 식론이 현상세계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하는데 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신유식이 알라야식의 능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알라야식이 모든 것을 창출해 내는 것처럼 취급하는 유적인 편향을 반대하고, 현상세계는 식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지 알라야식이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원측과 규기의 주요한 관심 및 강조점의 차이는 수행과 사회적 실천 및 중생을 보는 보는 눈에 있어서 가장 잘 드러난다. 원측의 관심은 이미 불교의 가르침에 뜻을 두고 일정한 단계에 오른 경지(十住 이상)의 수행에 관심을 집중하는 신유식과는 달리 보다 아래 쪽으로 향하고 있다. 원측은 처음 불교에 마음을 두는 단계(發心位;十信)에 관심을 집중하고 여래의 경지도 발심과 같은 것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관심의 차이는 현실의 인간을 분류하여 그 구제가능성을 논의하는 오성각별설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 까닭은 오성각별설이 규기를 중심으로 하는 자은종파의 사람들이 자은종 특유의 사상으로 자임하는 것이었고, 그것의 핵심인 무불성의 존재(一闡提)는 결정코 성불하지 못한다는 주장에 원측이 일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고 정면에서 반박하였기 때문이다. 원측은 모든 중생(五性 모두)에게 여래가 될 가능성(如來藏)이 있다고 본다. 원측은 처음부터 중생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다만 가능성의 측면에서 뿐 만 아니라 결과라고 하는 측면에서도 중생을 불성과 관계시킨다.

이상과 같이 원측은 신유식이 지닌 이론적 논리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지니는 일방성과 편협성을 거부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유식불교의 체계를 확립했다.


정영근/서울산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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