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에 머물며 정진 계속 온 가족 성도·출가 이루기도
중국의 방거사(龐居士)
중국의 선종은 대대로 이름있는 거사를 적지않게 배출해 냈으나 그중에서도 특출한 이가 방거사다. 유마의 화신이니, 보처대사(補處大士)니 하는 평을 들을 만큼 선종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신통과 묘용은 물을나르고 장작을 쪼개는 일'이라는 주장은 일상생활의 불교관을 가장 잘 표현한 말로 후세에 즐겨 인용된다.
방거사의 가족 또한 선수행에서 방거사 못지않은 경지를 이루었다. 하루는 단하 천연선사가 방거사를 찾았는데 문 앞 샘가에 앉아서 캐온 나물을 다듬고 있는 방거사의 딸 영조(靈照)를 보고 `아버님이 계시느냐'고물었다. 그러자 영조는 나물바구니를 놓고 두손을 모아 차수(叉手)하고 섰다. 단하가 다시 묻자 이번에는 바구니를 들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단하가 문득 돌아서 나가려는데 밖에서 방거사가 돌아왔다. 뒤에 영조가 아버지에게 단하가 왔다 간 사실을 이야기하자 거사가 딸에게 물었다. “단하스님은 계시냐”. 영조는 “단하스님은 이미 떠나셨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방거사가 “적토우(赤土牛)가 낮잠을 잤구먼”하고 말했다.
신라시대의 부설거사
어려서 불국사에서 출가하여 계(戒)와 정(定)이 높고 식견이 예민했다.
영조와 영희 등 두 도반과 함께 두륜산 등지서 10여년 정진한 뒤, 오대산문수도량을 참배하러 가던 중 두릉(지금의 전북 만경) 구무원(仇無 )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딸 묘화와 인연이 되어 결혼했다. 도반들은 그의 파계를비난하며 떠났지만 그는 재가에 머물며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을 낳고서도 보살의 실천행으로 정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두 도반보다 먼조 성도를 이루었다. 부설거사가 입적한 뒤 등운과 월명도 출가하여 도를 깨우쳤다.
묘화는 110세까지 살다가 죽기 직전에 집을 보시하여 절을 만들었다.
(참고문헌 《선사신론》(우리출판사), 《한국불교인명사전》(불교시대사), 《불교사전》(동국역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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