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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찰 설화와 전설-서울 호압사

기자명 임연태
  • 동정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虎氣 눌러 억조창생 화평기원

호랑이 괴물 밤마다 궁궐 공사 방해
“저 산에 절 지어라” 새 도읍 건설 순조

왕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꿈만 같은 일이 연거푸 일어나고 있었다. 새 도읍을 정해 천도해 온 직후 민심의 수습과 국운의 기틀을 잡는 일도 여간한 일이 아니었거늘 새 왕조의 터전에 궁궐을 짓는 일이 불가사의한 방해를 받고 있었다.
“전하. 어제밤에 또 무너졌나이다.”
아침 조례에도 나가기 전 이같은 보고를 받는 태조의 마음은 암울하기 그지 없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

왕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윗대 조상들은 고려국의 충신이었다. 여진족들의 터전인 남경(南京 : 간도지방)에서 원나라의 벼슬을 하던 이안사(李安社)로부터 대를 물려 무술과 행정력을 키워 마침내 고려국의 실력자로 흥성케 된 집안 내력을 배경으로 태어난 그 역시 출중한 무예와 영민한 지략으로 점차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함락된 수도 개경을 탈환하는데 사병 2천을 이끌고 앞장서면서 결정적으로 군부에 입신을 했다. 그 후 북의 침략을 평정하고 남쪽을 노략질하는 왜구를 섬멸하는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엇보다 왜구 섬멸에 있어 우왕 6년 전라도 운봉지역에서 대승을 거둔 황산대첩은 그의 무관적 재질을 한껏 과시한 싸움이기도 했다.

그렇게 군부를 장악한 후 장군 이성계는 명나라가 작정한 철령위 설치를 두고 조정과 갈등을 겪었다. 장군은 조정이 정한 요동정벌에 반대 입장을 세웠으나 끝내 정벌로 국론이 기울었고 그는 마침내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 장군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던 것이다. 다시 이듬해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 병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다가 신흥정치세력들과 새 왕조를 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처음에는 국호도 그대로 고려를 사용하려 했으나 새 왕조의 기틀을 잡고자 명나라의 양해 아래 조선국으로 개칭해 명실공히 새 왕조를 창업한 것인데 그에따라 도읍도 한양으로 옮겨 왔고 이제 새 궁궐 공사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궁궐의 공사 도중에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목수들이 정성껏 집을 지어 올리면 어느날 밤 감쪽 같이 무너져 버리는 것이었다. 몇날을 두고 지은 집이 한 밤 사이에 폭삭 무너져 내리는 그 현실을 두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지경이었다.
“새 왕조가 들어설 땅이 아닌가 보다.”
이같은 소문은 왕을 몹시 불쾌하게 했다. 승승장구 출세의 길을 달려와 마침내 새 왕조를 열고 새 도읍을 정해 새 궁궐을 짓는데 그같은 흉흉한 일이 생긴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나 불쾌하고 개운치 못했던 것이다. 한양 땅을 어떻게 선택했던가. 이곳이 길지임을 정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자초(自超, 無學스님)였다.

왕은 자초 스님을 생각했다. 그는 군부에 있을 시절, 그러니까 우왕 10년(1384) 함경남도 학성지방에 살고 있을때 이상한 꿈을 꾸었었다. 남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역력한 모습을 가슴에 묻고 있을 수도 없는 그런 꿈이었다.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울고 1천의 집에서 일제히 두드려 대는 다듬이 소리가 났다. 허름한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개를 지고 나오니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떨어져 깨지는 그런 꿈이었다.

이웃에 사는 무꾸리 노파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했다. 그 노파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내 잡귀를 쫓는 기운은 있어도 대장부의 꿈을 함부로 이야기할 입장은 못됩니다. 여기서 40리쯤 떨어진 설봉산 토굴에 한 스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솔잎을 먹으며 칡베옷을 입고 사는데 얼굴이 검다하여 사람들은 흑두타(黑頭陀)라 부른답니다. 그곳에서 9년이 넘도록 꼼짝 않고 수행하고 있다니 그 어른을 찾아가 보십시오.”

이성계는 간단한 행장을 꾸려 노파가 일러준 곳으로 갔다. 과연 범상잖은 스님이 있었다.
“모두가 앞으로 임금이 될 것을 예고하는 꿈입니다. 1만집의 닭이 일시에 우는 소리는 높고 귀한 지위를 경하하는 것이고 1만집의 다듬이 소리는 임금을 모실 사람들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는 이치이고 거울이 떨어지면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또 서까래 셋을 짊어 진 것은 임금 왕자(王字)가 됩니다.”

찾아 온 청년의 꿈을 듣고 옷깃을 여미며 해몽을 해준 스님은 절대 이 일을 발설하지 말 것과 3년을 기한으로 5백의 성인을 모셔다가 재를 올리고 큰 절을 지어 그 이름을 석왕사(釋王寺 : 왕 될 꿈을 해몽한 절이란 뜻으로 안변 석왕사가 이 때 지어졌다 한다)라 함이 옳을 것이라 당부 했다. 이성계는 그 스님의 뜻을 따라 재를 올리고 절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왕조를 새로 일으키고 즉시 그 스님을 찾아 왕사로 모셨다.

그런 인연으로 지극히 모시는 왕사가 정해준 새 도읍인데 궁궐 공사에 이상한 장애가 발생한 것은 참으로 모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왕산으로써 진산(鎭山)을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삼아 도읍하면 길하리다.”

아직 왕사의 말이 귀에 생생한데 왕사의 혜안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목들이 자신들의 재주가 불충하여 지어 놓은 집이 무너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대목 가운데 우두머리격인 도편수들을 불렀다.

“너희들이 한치의 착오 없이 건조했음에도 상량도 하기전에 무너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왕을 능멸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 모두 똑똑히 알고 있으렷다. 건물이 무너지는 이유를 소상히 밝히라.”

도편수들은 추상같은 왕의 호령에 덜덜 떨고만 있어야 했다. 그 가운데 나이 많은 도편수 한 사람이 앞으로 몸을 구부리고 멈칫멈칫 말을 했다. “참으로 황송한 말씀이오나 저희들이 일을 끝내고 거처로 돌아가 잠을 자면 반드시 사나운 호랑이 꿈을 꾸고 그 호랑이의 잡아먹을 듯 우르렁 대는 소리에 잠을 깨곤합니다.” 그러자 모였던 도편수들이 일제히 자신도 그런 꿈에 시달린다고 합창을 하듯 말했다.

“나를 우롱하는 도가 이제 한 갓 꿈을 빌어 붙이는 선을 넘어서는구나. 내 어찌 그런 꿈타령에 속아 넘어가겠느냐.”

그러나 왕은 그 꿈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도 젊은 시절 한 토막의 꿈을 계기로 왕이 될 포부를 키워 오지 않았던가. 더욱 그의 마음을 미심쩍게 하는 것은 그 나이든 도편수의 말이었다.

“저희들이 하도 이상하여 밤을 세워 궁궐 짓는 현장을 지켜 보았는데 참으로 놀랍게도 지난 밤에 그 단서를 잡았으나 워낙 어이없는 일이라 전하께 고하기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었나이다.”
“두려울 것 없다. 말하라.”
“예. 지난밤 부엉이 우는 깊은 시각 반은 호랑이요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괴물이 나타나 순식간에 지어 놓은 궁을 허물어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날 밤 왕은 밤을 세워 궁궐 짓는 현장을 지켰다. 주변에 솜씨 좋은 궁수들을 많이 매복을 시킨 채.

밤이 깊었다. 달빛이 이윽히 기울고 있었다. 온갖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 왕의 귀에 뭔가 ‘휘 - 익’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번쩍 차린 왕은 보았다. 도편수들이 말하던 그 괴물. 반은 호랑이 형상이요 나머지는 알 수 없는 기괴한 모양의 괴물이 한창 짓고 있는 건물로 가더니 마구 부수어 대는 것이었다.”

순간 빗발치듯 화살이 날았다. 그러나 화살은 괴물을 맞히지 못햇다. 정확히 겨냥된 화살도 괴물 앞에 가서는 방향을 틀어버리는 듯했다. 괴물은 화살과는 상관없이 건물을 마구 부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짧은 순간의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휴 - 우. 진정 이곳은 도읍의 길지가 아니란 말인가.”
거실로 돌아 온 왕은 장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통. 그 밤 왕은 비통한 마음으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아닙니다. 대왕이시여, 걱정을 거두소서.”
문밖에서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희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운 노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뉘시오.”
“그건 알 필요가 없습니다만 다만 이곳이 새도읍의 길지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길지인데 왜 이런 괴이한 일이 일어 난단 말입니까.”
“저시 한강 남쪽 봉우리가 보이십니까.”
“아니 …”
왕이 노인이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 먼 발치의 산자락이 바로 조금전에 보고 온 그 호랑이 괴물의 형상과 흡사 한 것이 아닌가. 인왕산을 향해 달려 오는 호랑이 형상. 왕은 바로 그 산의 지세가 너무 강해 궁궐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 기운을 눌러야 한다는 노인의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확 풀리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그 호랑이 형세의, 기운 찬 산세를 누르기 위해 호랑이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탑을 세우고 심장부분에는 절을 지으라고. 그리고 호암산 주변 네곳에 돌로 개의 형상을 다듬어 놓아 호랑이가 개들을 좇도록 했다. 강을 넘어 오지 말고 개들이나 잡아 먹으며 그곳에 있으라는 뜻이었다. 관악산 줄기의 하나인 호암산에 절이 지어지며 궁궐공사는 순조로와졌다.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고 억조창생의 화평을 기원하며 지어진 절이라하여 절 이름은 오늘날까지 호압사(虎壓寺)라 불린다.


임연태 기자

■역사와 볼거리

금강승 선관무 수행
불교 무술 포교 도량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호압사는 조선 태조때 한양 천도무렵에 졌다고 하지만 기록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왕명으로 지어졌다 한다. 전설을 근간으로 보면 태조때 지어졌다가 피폐해 태종이 다시 중수를 명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때 호갑사(虎岬寺) 호암사(虎巖寺)라 불리기도 했으나 산세의 호랑이 형국과 관련된 호자는 그대로 쓰였다. 창건후의 자세한 내력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다만 조선 헌종 7년(1841) 4월 의민(義旻)이 상궁 남씨와 유씨의 시주를 얻어 법당을 중수했고 근래들어 불사가 계속되어 사격이 일신되고 있다.

호압사에 특별한 문화재는 없으나 도심에 인접해 있어 평일과 주말이면 등산객이 줄을 잇는다. 약수가 좋아 인근 주민들도 많이 찾는다.

호압사는 최근 금강승선관무의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50여평 도장에서는 호신과 건강관리를 위한 선체조 등 간단한 무술에서부터 고급 과정의 정통 금강승선관무가 전수되고 있으며 중국 소림사와도 무술 교류를 하고 있다. 주지 원욱 스님이 국내에서 정통으로 금강승선관무를 전수 받았고 이를 통한 포교에 원력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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