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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칼럼 - 비구니를 생각한다

기자명 고은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불교 원시교단 첫걸음에는 출가여성수행자에 대한 상징이 없다. 상징은커녕 부처님이 네란자라강 기슭의 고행으로부터 떠나서 유미죽을 얻어먹은 처녀도 교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는 지난 날의 스승들에게 그가 깨달은 진리를 전하고자 했으나 그들은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러자 그의 수행 동료였던 고행승 다섯 사문이떠올랐다.

부처님이 유미죽을 얻어먹고 고행 수도를 폐기하자 파계자! 변절자!하고규탄하던 사람 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있는 파시 부근의 사슴동산으로 갔다. 거기서 그를 거부하는그들을 진지하게 설득함으로써 첫 제자를 삼은 것으로 교단이 시작된 것이다. 거기에는 두말할 것 없이 여자는 없었다.

그 뒤로 왕사성 시대의 교단은 엄청난 귀의자들이 생겨났다. 항상 부처님의 주위에는 천단위의 대중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여성을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출가를 결단하는 여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니승 또는 여승이라고 하고 우리나라 속어로는 `신중'이라고 하는비구니의 출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원시경전을 통해 생생한 여승들의 언행을 알 수 있다. 그 뿐더러부처님이 가비라성의 귀향으로 그의 아내까지도 그를 길러준 양모까지도삭발 출가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리하에 출가후 남녀, 세속 재가의 남녀로 구성된 교단의 대중 4부중이성립된 것이다.

하지만 출가자들의 남녀관계가 교단의 규범에 해로운 사건이 발생하면서계율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육군비구의 악행은 비구 뿐아니라 비구니들도그 비구들에 버금할 정도였다.

당시의 여성관으로서는 여성은 남성보다 업장이 두터운 존재로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성은 수행하기 어렵고 성불하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던 적이있었다.

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율이 2백50계와 5백계의 차이로 된 것도 그런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그 뿐더러 출가자의 승단은 철저하게 비구니를 부속화시켰다. 이 점은가톨릭사제와 수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같은 오랜 전통적 구조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이미선종의 초조 달마는 남녀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든 적이 있다. 그의 진수를 이어받은 제자 중에 여승 총지도 있지 않은가.

마침 비구니의 위상문제를 제기하는 우리 조계종 비구니들의 각성이 나타나고 있다. 남녀 불평등으로부터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시대에 비구니의남존여비적인 오랜 현상은 타파되거나 변화되어야 한다.

이제 원시교단 당시의 여성관은 출가여성의 치열한 자기수행과 보살행을통해서 남성이 상으로 빛나는 오늘의 여성관이 아니다.

계율문제도 남녀의 차별이 극대화된 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니2백50계 및 5백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어 마땅하다.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고은 (본지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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