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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성곡 '용성'을 보고 김호성

기자명 김호성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깨침, 뜻,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나는 음악을 모른다. 어쩌면 음악은 알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닐 수도 있겠다. 말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리라. 따라서 나같은 문 밖의 중생에게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신, 저 도(道)의 세계와는 지근(至近)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음악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즐김[樂]의 대상이 된다. 대상이라고?아니다. 훌륭한 소리는 그 스스로 대상이 됨을 거부함과 동시에 청중이 대상으로 남는 것 역시 허락하지 않는다. 소리 속에 모두 하나가 되게 한다.있는 것이라곤 오직 소리뿐이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중생도 없다. 밖에 꽃비가 내리던 그날(1998.4.23).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국악교성곡 `龍城'이 그러하였다. 90분 동안,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만이, 소리만이 있었다.시간마저 멈추었다. 무시간(無時間)의 제엄만이 있었다. 그만큼의 해탈이 우리를 찾아왔던 것이다.

박범훈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그의 음악을 마주하면 나는 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달리던 만주벌판의 말발굽소리를 듣는다. 겸하여 빈터로만 남아있는 왕릉사지가 눈에 선히 보인다. 저 광활한 대륙기질,그것이 우리 민족의 본래면목이리라. 소리는 민족이다. 누가, 우리의 소리가애잔한 애상이라 하는가. 한(恨)깊은 시련일망정 꺾이지 않는 힘이 배어 있는데 …. 박범훈의 소리는 힘이다. 민족이다. 용성과 `龍城'의 화두는 대각이고, 민족이었다. 즉 깨침은 힘이다. 민족도 힘이다.

용성은 누구인가? 스님이다. 그러나 스님이 아니다. 용성은 그 스스로 민족이었다. 이는 용성의 대각사상이 증언하는 바이고, 근래의 불교노래속에다시 민족을 받아들인 작사가 목정배의 노래철학이기도 하다. `龍城'은 그리하여 깨침, 뜻,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나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나는 울었다. 그토록 집요하게 짓누르고 소외시켰건만, 다시 살아나는 것들,우리 소리, 우리 불교, 우리 민족을 위하여 감격의 울음을 울었다. 용성은그렇게 살아나고 있었다. 스크린 위로 우리의 가슴 위로 그 살아나는 용성속에 살아나는 소리 속에 민족이 불교가 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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