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종정의 깨달음과 교수의 깨침 [14]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밤늦은 고속도로주변의 풍경이며 쌩쌩 달리고 있는 크고 작은 차들을쳐다 보느라 잠깐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나에게 배교수가 물어왔다.

"최현오씨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요즘 많은불자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깨침의 경지를 믿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깨달음의 경지를 믿지 않다니요?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불자라고 하겠습니까?"

의외의 질문 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얼른 돌려 핸들을 잡고 있는 배교수의 옆얼굴을 쳐다보면서 반문했다.

"글쎄 글이나 말로는 그런 경지가 있다고 상정하는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것 같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특히 사회과학적인 안목을 견지한다고 하는 쪽일 수록 더 그런 경향이짙다고 보는데…"

나는 왠지 가슴이 뜨끔 했다. 배교수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것같았다. 미국에 가기 며칠전 주위에 자주 어울리는 동료들과 바로 그깨달음의 경지란 과연 무엇인가. 또 그 깨달음은 우리 사회와 역사에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얘기를 나눴었는데 그 얘기를 배교수가꺼낸 것이다.

사실은 그때뿐 아니라 나의 구도 역사를 관철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속퇴를 결심하게 됐던 것도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교수님이 강조 하시는 깨달음과깨침의 차이 그 말씀 아닙니까? 해오와 증오의 차이 던가요? 요즘 일부젊은 스님네나 학자들이 습이 남아있는 해오를 그대로 불교 깨달음의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 이시죠?"

"맞습니다. 바로 그 얘기입니다. 현오씨는 어떻게 생각 하는지…"

"저야 아직 해오의 경지 조차 그게 어떤 것인지 모르기는 하지만 한점의혹도 없는 진정한 구경각인 증오가 해오 이후에 존재한다고 믿는 축에속합니다. 오늘 노스님도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왠지 나의 대답은 그렇게 나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냉정하게 회상해보면 당시 나는 스스로 투철하고 확고부동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오히려 며칠전 동료들과 나눈 대화 때문에 법회 전 까지만 해도 평소보다더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 바른 대답이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해오를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증오를 부정해서는 결코 바른 불법 수행이 이루어질 수 없고 따라서 진정한 깨침에도절대이를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바로 이말이 돈오돈수 돈오점수 논쟁에 관한 배교수의 입장을 한마디로압축한 것이었다.

어찌보면 모호한 얘기 일 수도 있었다. 즉 깨달음에 단계를 둔다는 것은돈수를 강조하는 전통 선맥에서 볼때는 위험하기 짝기 없는 지해로 빠지는것아닌가해서 금기로 여기는 것 아닌가. 어차피 돈오돈수에서는 돈오와돈오점수에서의 돈오의 경지가 다르다고 인정하면서 애써 그 둘을 접목시키려 하는 배교수의 입장은 양쪽에서 모두 공격을 받을 소지를 안고있는 것이다.

증오를 부정한다는 얘기는 불교의 깨달음 자체를 부정한다는 얘기는아니다. 깨달음의 경지가 흔히들 생각하듯 신통묘용하며 아무런 걸림이없는 우화등선 신선의 경지는 아닐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어차피 육신을받아 태어나 세상을 살아온 이상 아무리 깨우쳤다 해도 최소한의 육체적욕구, 감정의 변화를 포함하는 훈습 혹은 습이라 불리우는 육신의 타성이남아있게 마련 아니냐는 것이었다.

물론 불도를 배우고 그것을 이루겠다고발원한 불자들이 부단히 그 습을 여의기 위해 닦고 또 닦아야 하는 것은올바른 일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노력 한다 해도 습이 띠끌 한점 만큼이라도없는 경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것 아이냐는 말이었다. 즉 성불, 구경각이라 불리우는 증오의 이 경지는 자신 스스로와 후학들의 부단한 참구를위해 조사, 선지식 들이 애써 설정한 상념 속에서나 가능한 일종의 환상이라는 얘기였다.

이런 입장을 견지 하게 되면 습이 한점도 없는 경지인그 증오를 현실적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해오가 사실은 끝이라는얘기였다. 즉 해오가 바로 구경각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의 사유활동인 깨침이라는 과정을 통해 우주의 질서를벗어나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느냐? 과연 그경지가 실재한 것인며 가능한 것이냐? 또 있다면 누가 그 경지를 중득했고그 경지에서 구체적으로 이룬 일이 무어냐? 또 그 일은 현실세계의 뭇중생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이냐는 물음에서 출발한 해석이다. 다분히깨침의 경지를 신통묘용 까지를 의식한 해석으로 상대적으로 인간적인동시에 과학적 인식이라자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며칠전 동료들과 어울렸을때 좌중을 지배적으로 압도한 논리가 그것이기도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