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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정의 깨달음과 수교의 깨침 [16]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배교수의 집은 아담한 단층 가옥이었다. 밤늦은 시각 이었음에도 배교수의 부인은 나를 무척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배교수의 부인이 소아과전문의라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는 터 였다. 부인의 차분한 얼굴을보는 순간, 나는 배교수가 어린 두딸과 부인을 놔 둔채 종정 스님 문하로출가 하려 했을때 이 부인이 어떻게 반응 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면서 배교수가 부인과 상의를 한 뒤 머리를 깎았을까, 아니면아무런 통보도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출가를 했을까 하는 점이 문득 궁금하게 다가왔다. 또 어느 날 돌연 배교수가 집으로 돌아 왔을때 부인은 그느낌이 어땠을까?

웬지 이 부인이라면 대문에 들어서는 배교수를 보고 씩 하고 한번 웃고말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광경이 눈에 선 했다.

집안 역시 두 양주의 분위기와 어울리게 차분하면서 고풍스럽게 단장되어 있었다. 배교수의 장성한 두 딸이 모두 출가 했기에 집에는 두 부부만이 단출이 살고 있다고 했다.

거실에는 동양화며 서예 액자 들이 몇점 걸려 있었다. 그중 거실 입구쪽에 나란히 쌍으로 걸려 있는 액틀의 글은나에게도낯이익은유명한 노장스님의 글씨였다.

사음수성독 우음수성유

우학성생사 지학성보리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듯 어리석게배우면 낳고 죽음을 이루고 지혜롭게 배우면 보리를 이룬다.)

당수허회문지 필유기발지시
(마땅히 모름지기 생각을 비워서 법을 들으면 반드시 공부를 깨달을 때가있으리라.)

두 구절 모두 보조 스님의 계 초심학인문에 나와 있는 글이었다.

족자 아래 문갑 형태의 가구 위에는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다. 보통크기의 사진 여러장을 끼워 넣을 수 있는 큰 액자였다. 대개 배교수의두 딸등 가족사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액자 속에는 젊은 시절의배교수가 종정스 님과 함께 절마당에 서 있는 낡은 흑백 사진도 있는것이 아닌가. 출가 전인지 아니면 속퇴 후인지 모르겠지만 뒷짐을 쥔채근엄한 표정의 종정 스님 옆에 서있는 배교수는 속복차림이었다.

보조스님의 글씨 아래 놓여 있는 종정스님의 사진.

"교수님, 어째 어울리지 않는데요."

내가 짐짓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 하지요?"

내 눈길이 그 사진에 쏠려 있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 했을때 배교수가오히려 나에게 물어왔다.

"보조 스님이라면 종정스님이 그토록 싫어 하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글씨 밑에 종정스님의 사진이 놓여 있으니…"

"나는 종정스님이 결코 보조스님을 싫어 하신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다만 후학 들이 보조스님의 점수론을 핑계로 깨침에 대해 게으름을 피우는것을 경계 하시기 위해 방편으로 다소 심한 말씀을 하신 거지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배교수 부인이 권하는 소파 쪽으로 걸음을옮겼다.

거실 소파에 앉아 우리는 본격적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시간은 이미 자정이 넘어서고 있었다. 유자차를 날라온 부인에게 배교수며내가 먼저 잠자리에 들어갈 것을 권했지만 부인은 내일 아침 진료가 없어괜찮다면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부인은 가끔 고개만 끄덕 였을뿐 조용히우리의 얘기를 경청하기만 했다.

그날 밤 나는 깨달음 깨침에 대한 배교수의 견해와 구도 행각이라고 말해도 전혀 틀리지 않을 그 자신의 인생 역정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물론나의 은근한 유도 질문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배교수는 나에게 당시 한국의 젊은 불자들의 불교관이며 가치관을 듣고 싶어 했기에 나 역시 나름대로의 성의껏 솔직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조금전 차속에서의 장담과는달리 깨침의 경지에 대한 확신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까지 고백 했고 배교수로부터 나름대로의 처방전도 받을 수 있었다.

새벽 3시가 가까워져서 끝난 우리의 대화는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도 이어졌고 또 뉴욕시내로 다시 나가는 배교수의 차 속에서도 이어졌다. 기차를타겠다고 했던 나를 배교수가 굳이 자신의 차로 다시 뉴욕 시내의 형주네잡지사 사무실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뉴욕 여행에서 내 머리 속에는 배교수의 생애 말하자면 구도행각이 선명하게 각인 되었다. 물론 군데 군데 자의적인 상상이 삽입되는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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