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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장편소설-산은 산 물은 물이로다36

기자명 정찬주
제7장 시절인연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선은 이화령이었다. 이화령이 충북과 경북의 도계(道界)인 셈이었고, 이제 사람들은 이화령을 문경 새재라고 잘못 부르고 있었다. 어느새 이화령이 충북과 경북을 넘나드는 승용차들의 애용 도로가 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도 엄연히 문경새재 따로 있고, 죽령 따로 있는 게 사실이었다.

정 검사는 이화령 고개 휴게소에서 승용차를 멈추었다. 여자가 볼 일이좀 있다는 눈치를 아까부터 보여 왔기 때문이었다. 말투가 활발하지 못하고안색이 좋지 않은 게 생리 기간 같게도 보였다.

여자의 성은 서(徐), 이름은 효(曉)로서 외자였다. 그녀 아버지가 출가하면서 그녀 어머니에게 딸을 낳든 아들을 낳든 새벽 효자를 써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 검사는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까지 찰옥수수를 사서 씹었다. 옥수수 알은 어른 치아를 연상케 할 만큼 컸으므로 한개를 다 먹기도 전에 질렸다. 그렇다고 남은 옥수수를 행상 촌부에게 물릴 수는 없었다. 이미 값을 치른 뒤여서 여자가 먹지 않아도 승용차로 가져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과연, 여자는 옥수수를 외면했다. 그 모양이 남성의 생식기처럼 생겨서 입에 대기 싫다는 것이었다. 정 검사는 짚히는 데가 있었지만 더 묻지 않고승용차를 몰았다. 어쩌면 그녀의 그런 옥수수 기피증은 일찍 출가한 그녀의아버지로부터 연유하는 생채기 같은 갈망이나 피해의식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 되시는 분의 법명은 무엇입니까.”
“무(無)자 상(相)자예요.”
“아, 이제 생각납니다. 그때 서효 씨 편지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제가 정 검사님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죠.”
“그때 서효 씨는 소리하는 공부를 가리켜 아버지 찾는 일이라고 했는데,그 말이 새삼 떠오르는군요.”
“저는 지금도 제 소리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라고나 할까, 그리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서효 씨 어머니는 왜 아버지의 존재를 숨겼을까요.”
“속가 인연을 끊은 분이므로 이 세상에 없는 거나 다름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서효 씨 어머니께서 무상스님을 찾지 말라는 유언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출가를 하여 속세의 인연을 끊으셨다고는 하지만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딸은 딸 아닙니까.”
“마치 심문하는 것 같군요.”
“하하하. 재판에도 인정심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 검사는 별 부담없이 여자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꼭 알아야 할 이유는없지만 직업상의 타성 때문이라고 하는 게 옳았다.
“원암 선생은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네요. 오늘 함께 오지 않은 걸 보니.”
“그렇습니다. 아들 녀석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했답니다.”
“어머, 저런.”
“치료비도 받지 못할거라고 합니다.”
“왜요.”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건너가다 당한 사고라고 하니까요.”
승용차는 이화령에서 30여 분만에 바리케이트가 쳐진 봉암사 관리실에 도착했다. 길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가은에서부터 우뚝 솟은 희양산이 카메라 줌렌즈에 걸린 피사체처럼 크게 보이기도 하고 작게 보이기도 하면서 원근감을 주었고, 길 옆의 개울물은 암반 위를 명랑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봉암사는 조계종의 특별선원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실에서부터등산객은 물론 내방객까지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일반선원은하안거 ·동안거 때만 출입이 제한되지만 봉암사는 일년 내내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관리실의 검문은 까다로웠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여자가 대답했다.
“무상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무상스님이라, 무상스님.”
관리원은 무상스님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스님, 처음 듣는데요. 봉암사 스님 맞습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살고 계시는 스님인데요.”
“미리 연락을 하고 오셨습니까.”
“원주스님한테 봉암사를 들르겠다고 미리 전화로 허락은 받았어요.”

그래도 관리원은 바리케이트를 올리지 않고 무선전화기로 확인을 했다.그러나 점심 공양시간인 듯 원주스님과 연결이 안되고 있었다. 그사이 관리원은 일지에 여자의 이름과 방문 용건을 적었다.

관리실 주변은 한적한 농촌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소 한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고, 밭에는 촌부들이 김을 매고 있었다. 예전에는 번성했을 마을일텐데 개울 이쪽저쪽으로 농가는 서너 채밖에 되지 않았다. 관리실 밖은 마치 봉암사가 어떤 기운을 빼앗아버린 듯한 그런 분위기였다. 하긴 관광객을통제하는 봉암사이다 보니 밖의 분위기는 썰렁할 수밖에 없었다. 절 부근에있을 법한 정원식 식당 하나 없었고, 서너 채의 허술한 농가가 누룽지처럼눌러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허락이 떨어져 승용차는 주차장에 놓아두고 올라갔다. 산길 양쪽으로는 송림이었다. 어느새 물소리 솔바람 소리가 났고, 풍경소리도 가늘게들려왔다.
봉암사.
정 검사는 걷다 말고 계곡을 내려다 보았다. 성철스님이 저 계곡에다 공부가 시원찮은 수좌들을 처박아넣었다는 것이다.

계곡의 원래 이름은 봉곡(鳳谷). 그러나 지금은 봉곡이라는 말 대신 봉암사 스님들이 용추동천(龍湫洞天)이라 부르고 있다.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계곡물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계곡물 밑은 암반이므로 게으른 스님들은성철스님에 의해 다리가 깨지고 이마가 찢겨져 저 맑게 흐르는 계곡물을 붉게 물들였으리.

그런가 하면.
저 바위에 앉아 이런 얘기를 하면서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 일이고. 성철스님이 즐겨하던 이야기 중 이런 것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철스님의 법문 중에 음담이었다.

“산에 올라가 보아야 다리의 힘을 알고, 물속에 들어가 보아야 키가 크고 작음을 안다.”
여기서의 키는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남근'이나 `도력(道力)' 등 다르게 해석되는 말이기 때문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말은 성철스님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라, 중국 당나라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가 한 것인데, 그 유래는 이러했다. 당시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그 대를 이을 아들을 죽여버리고 자신이 황제 노릇을 한 잔인한 여걸이었다. 그녀가 말을 하면 그것이 곧 지엄한 법이 되곤 하였는데, 그런 측천무후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그무렵 당나라에는 고승들이 많았으므로 누구를 국사(國師)로 삼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를 않는 것이었다. 칙령을 내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고승을몇분 모셔오라고 했는데, 결국 두 스님이 뽑히어 올라왔다. 한 스님은 신수(神秀)대사로 오조 홍인대사의 제자로서 지식이 출중했고, 또 한 스님은 일자무식이었지만 참선수행에 전념하여 확철하게 자성을 깨친 혜안(惠安)선사였다.

이때 측천무후는 음탕한 꾀를 내어 시험을 하였다. 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궁중에서 미모가 가장 빼어난 궁녀 두 명을 뽑아오도록 하라.”
“무엇을 하시렵니까.”
“그것은 묻지 말라. 반드시 누구라도 보면 넋이 빠질 만큼 미모가 빼어나야 하느니라.”
“즉시 대령하겠나이다.”
잠시후 측천무후는 두 스님을 불러 궁중 목욕탕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대사님들.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했소. 지금 목욕물을 받아놓았으니 여독을 푸소서.”
신수대사와 혜안선사는 즉시 가사 장삼을 벗고는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측천무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불려온 궁녀에게 옷을 홀랑 벗도록 명했다. 두 궁녀를 가까이불러 젖꼭지의 빛깔과 엉덩이를 만져보면서 처녀인지 아닌지 확인한 후, 두스님을 시중들도록 다시 명했다.

“목욕하는 대사님들의 몸을 잘 씻어주라.”
그러나 궁녀들이 목욕탕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자 목소리를 높였다.
“물시중만 하는 게 아니라 대사님들의 몸을 빈틈없이 씻어드려야 할 것이니라. 남자의 가운데 키까지도 정중히 씻어드려야 하느니라. 알아들었느냐. 그럼, 어서 들어가라.”
할수없이 두 궁녀는 신수대사와 혜안선사의 몸을 골고루 씻어주었다. 처음에는 궁녀 한명이 스님 한 분씩을 맡았으나, 나중에는 궁녀 두 명이 한조가 되어 스님 한분에게 매달리어 씻어주었다.

한편, 측천무후는 목욕탕에 구멍을 뚫어놓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두 궁녀가 스님의 가운데 키를 만지니 각기 반응이 달리 나타났다. 신수대사는 길쭉한 고구마처럼 붉게 동(動)하는데, 혜안선사는 절대로 성을 내지않고 있었다.

바로 이때 측천무후가 중얼거렸던 것인데, 그 말이 바로 `산에 올라가 보아야 다리의 힘을 알고, 물속에 들어가 보아야 키가 크고 작음을 안다'였던것이다. 여기서 키란 남근의 크기나 도력의 깊이를 은유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측천무후는 숭산 혜안선사를 국사로 정했고, 어디를 가든 스님을항상 가마에 모시고 다녔을 만큼 존경했다고 한다.

용추동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이름은 침류교(枕流橋)였다. 희양산이 계곡물을 베개 삼아 누운 다리라는 뜻이었다. 다리를 건너자 마자 젊은 원주스님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봉암사를 들러보고 싶다고 오신 분이군요. 점심은 했습니까.”
“김밥을 싸가지고 왔어요.”
“신도분들을 받지 않는데 특별히 허락이 떨어졌으니 조용히 둘러보고 가십시오.”
그러자 여자가 급히 말했다.
“여기서 월면암(月面庵)이 멉니까.”
“거긴 왜요.”
“사실은 봉암사보다는 암자를 보려고 왔습니다.”
“암자라고 하지만 양철로 덮인 원두막 같은 토굴입니다. 고색창연하지도않고 볼품없는 곳이죠.”
정 검사는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에 무상스님이 있을 것이었다. 그곳에 그녀의 속가 아버지가 있을 것이었다.
“어디로 갑니까. 스님.”
“길이 워낙 가팔라서 힘들 텐데요.”

젊은 원주스님은 이해할 수 없었던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볼 것이아무 것도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가려느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도 여자가 완강하자 가는 산길을 알으켜주었다.
“저 희양산 암봉 바로 밑에 있어요. 저 선방 위로 난 산길을 타고 아마두어 시간은 올라가야 할 겁니다.”
“스님, 여자 혼자 가기는 무섭고 힘들겠군요.”
정 검사가 금세 질린 얼굴을 하니까 스님이 또 물었다.
“처사님은 여기 남으려구요.”
“아, 아닙니다. 저도 같이 갈겁니다.”
정 검사는 얼떨결에 동행을 한다고 말해버렸다. 사실 무상스님을 만날 이유는 없었지만 여자를 호젓한 산길로 보낸다는 것이 찜찜해 그렇게 말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 검사는 봉암사를 들르지 않고 바로 암자로 갈 생각은 추호도없었다. 자신은 지금 성철스님의 행적을 뒤쫓고 있지 않은가. 6 ·25전쟁의뇌관이 터지려 하자, 성철스님은 봉암사를 떠나 월내 묘관음사로 간 후, 다시 고성 문수암으로 거처를 옮겨 머물다가 전쟁이 끝났을 때, 이윽고 안정천제굴로 이동하여 토굴살이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검사 자신도 그런 행로를 밟아야 할 의무가 있음이었다.

“경내를 돌고 오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침류교 아래서 쉬고 있겠어요.”
원주스님이 공양간으로 가면서 정 검사에게 주위를 주었다.
“저 방 가까이는 가지 마십시오. 하루 두 시간만 자는 스님들이 계신 방입니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예전 일주문이었을 자리에 들어선 남훈문(南薰門), 그 문을 들어서고 보니향곡스님과 성철스님의 일화가 다시 떠올랐다. 여기서 향곡스님은 헌식대바위로 발등을 찌었으며, 성철스님은 탑전의 찔레 넝쿨을 맨발로 밟으며 서로의 법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를 “문수야”, “보현아” 하고 부르면서 “한구덩이 빠져 죽자”고 소리쳤음이다.

정 검사는 삼층석탑을 지나 지증대사부도탑과 탑비를 감회에 젖어 바라보았다. 부도탑은 추녀 한끝이 허물어져 있고, 탑비는 비문을 알아볼 수 없게끔 마모되어 다듬이돌처럼 번지르르했다.

`그렇다고 어찌 봉암사의 역사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인가.'
정 검사는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결사를 한 그 시절을 가만히 떠올리며마치 비문에 새겨져 있는 사연처럼 읽어내려갔다.
실로 봉암사 결사는 8백여년 전의 보조스님의 정혜결사와 견줄 만했다.둘 다 스러져가고 민멸되어가는 조선 불교를 되살려낸 결사였던 것이다.
“아아아.”
정 검사는 탑전을 돌면서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6 ·25가 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당시 봉암사 결사가 10년만 더 지속되었다라면. 그랬더라면 오늘날의 불교는 이런 천박한 모습에서 벗어나 있지 않겠는가. 무소유 삶을 살겠다고 출가한 스님들이 명리 다툼이나 재산 분쟁으로 속인처럼 치사한 싸움까지 벌이다가 끝내는 얼마나 많이 세간법정에 고소 ·고발해 왔던가.

스님들이 호미나 삽을 들고 우루루 마당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노승도있고 햇중도 있고, 수염이 더부룩한 수좌도 있다. 아마도 점심공양 후의 울력 시간인 모양이다. 마당에는 노줏대도 그대로 있다. 성철스님이 여법하지못한 목바루를 망치로 깨트렸던 장소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청빈한가람은 죄 사라지고 없고,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 석물로서 탑과 부도탑과 노줏대뿐이다.

그러나 봉암사의 역사를 어찌 그뿐이라고 할 수 있으리. 정 검사의 눈에는 청담스님과 성철스님, 그리고 향곡스님, 자운스님, 보문스님, 월산스님의 혼백(魂魄)들이 물감처럼 희양산 허공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는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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