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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장편소설37-산은 산 물은 물이로다

기자명 정찬주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제7장 시절인연(2)

정 검사는 묘유문(妙有門) 앞에서 현재의 선방인 태고선원(太古禪院)을 다시 바라보았다. 물론 예전의 선방이 아니라 신축 가람이었지만 6·25전쟁전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당시 스님들의 봉암사 결사가 이렇게 막을 내렸던 것이다. 여기서 법전스님의 얘기를 그대로 옮기자면.

“그때 공비들이 산에서 나온다 어쩐다 소문이 돌았어요. 그러자 성철 노장님은 김 처사한테 기증받은 장경을 걱정했어요. 공비들이 돈이 될 줄 알고 장경을 지고 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노장님은 금봉스님이 있는 갑장사도 가보시고 그랬어요. 결국은 월내 묘관음사로 장경을 옮겼지요. 그런다음 노장님은 봉암사를 나가셨어요.”

성철스님이 귀중한 장경을 옮겼다면, 청담스님은 성철스님을 미리 피신시킨 셈이었다. 청담스님은 늘 “나는 여기서 희생되더라도 성철스님은 우리 한국불교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노장님이 미리 나가신 상황에서 청담스님하고 우리는 평소대로 관음 정근(精勤)에 들었지요. 그때 공비가 나타났어요. 아직 6^25가 나기 전이었지요. 공비들은 절 뒤에서 우리를 살펴보고 있다가 저녁 예불하고 난 후 큰방에서 좌선하고 있는데 구두 신은 채 들어왔어요. 그래서 내가 그러지 말고거기 앉으라고 하니까 좋다고 앉기도 했어요. 공비들은 우리들에게 꼭 대사선생님이라고 했지 나쁜 말은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때 우리 방에는 헌병하다가 중 된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법전스님은 그 상황이 희극으로 떠오르는지 얘기를 하다 말고 하하하 웃었다. 생사를 초월하겠다고 수행하고 있는 수좌가 일개 공비 앞에서 의연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꼴이 우스웠던 것이다.

“부들부들 떠는데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어요. 다행히 그 스님을공비가 못 봤어요. 공비가 잡으러 온 스님은 당시 원주를 보던 보경스님이었어요. 산에 공비들이 있다고 보경스님이 신고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경스님을 지목해 묶어서 절 옆으로 데리고 나간 것이지요.”

그런 다음 공비들은 절 살림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곶감 깎은 것 하며, 소 한마리 판 돈 하며, 독에 남은 쌀까지 다 털었어요. 나중에는 지대방까지 털려고 하는데 큰방에 들어온 총 든 사람이 말렸지요. 그러니까 지대방만 안 뒤지고 쓸 만한 것은 다 뒤져 가지고 간거지요.공비들 중에는 여자도 있었어요. 심하게 기운 누더기를 입고 종 옆에 서 있는데, 동굴에서만 살아 햇볕을 보지 못해선지 얼굴이 백지장 같았어요. 나중에는 그 여자와 총 맨 사람이 먼 지명을 대면서 봉암사에서 사라졌어요.”

먼 지명을 굳이 스님들 귀에까지 들리게 하면서 사라진 것은 그들만의 위장전술이었다. 사실은 희양산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먼 지역으로 가는 것처럼 소리쳐 들리게 하였던 것이다.

이날 보경스님은 구사일생으로 살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청담스님이 공비대장을 설득시켰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업에 협조하지 않은 저 중은 인민의 적이오.”
“오햅니다. 우리 같은 중들이 협조할 게 뭐가 있겠소.”
“아닙니다, 대사 선생님. 저 중은 처형해야 합니다.”
공비 대장은 실제로 보경스님의 눈을 천으로 가리고 손을 뒤로 묶어 참나무 고목에 세웠다. 그리고는 서너 발 물러서더니 총구를 들어 겨냥했다. 그러자 청담스님의 소리도 다급해졌다.

“이보시오. 저 스님이 뭘 잘못했단 말이오.”
“이 동네 이장하고 내통했소.”
그러고 보니 마을 이장이 공비가 나타났다고 지서에 신고를 한 뒤, 원주인 보경스님한테도 귀띔을 해준 모양이었다. 이장에게 자백을 받고 나서 저렇게 길길이 날뛰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 천천히 말해 봅시다. 이장이 저 스님에게 말한 것을 들었다고 해서그것도 죄가 된단 말입니까.”
“내통한 자이므로 우리를 곧 신고할 게 뻔하오.”
겨냥한 총구를 겨우 내려놓게 한 후, 청담은 다시 그를 설득했다.
“우리 중들에게는 편가르기가 없소. 적이니 내 편이니 하는 말이 없다는말이외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다는 말이오.”
“부처님이 있을 뿐이오. 당신도 부처될 사람이고, 당신들이 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부처될 사람들이외다. 따라서 누구나 다 부처될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괴변이 어디 있소.”
“괴변이 아니오. 그래서 당신들이 우리 살림을 다 가져가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는거요. 적이라고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으니까 그런거지요. 오히려 우리는 고맙게 생각하지요. 보시만 받는 우리들에게 적선(積善)할 기회를주었으니까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오.”
“그렇소. 고달픈 중생들과 동고동락하는 것이 우리 중들이오.”
“듣고 보니 우리 사회주의 사상 같수다.”
총을 든 공비 대장이 슬그머니 청담스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희안한 설법이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사 선생님 인품 때문에 저중을 살려주겠소.”
“바로 그 마음이 불성입니다.”
“불성이라뇨.”
“부처가 될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난 그런 성품에 관심없소. 우리 혁명 과업이 완수되어 인민이 평등해지는 것이 소원일 뿐이오.”
“그것도 불성입니다.”
“자, 대사 선생님. 그 불성 타령 그만 하시고 내가 지금 총을 허공에 쏘겠소.”
청담스님이 의아해 하자 공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우리 동무들이 저 중을 처형한 줄 알지 않겠소.”
과연 그랬다. 공비가 허공에 대고 몇방 총을 쏘자, 아래쪽에서 웅성거리던 공비들이 “대장님, 어서 오십시오” 하면서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내려가면서 공비 대장이 청담스님에게 절을 꾸벅했다.
“대사 선생님. 혁명 과업이 완수되어 인민이 평등하게 잘살 수 있도록 기도나 해주십시오.”
청담스님에게 완전히 설득당한 공비 대장이 보경스님에 대한 살의(殺意)를 버리고, 오히려 자신들의 소망을 부탁하며 내려간 것이었다.

상념에 잠긴 지 한 시간이나 흘러간 모양이었다. 정 검사는 울력을 마치고 돌아오는 원주스님을 보고서야 여자를 생각했다.
“그렇지. 월면암을 가기로 했지.”
여자는 아직도 용추동천 바위에 앉아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고 있었다.울력을 마치고 돌아오는 스님들이 그녀를 힐끔거리며 지나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었다.
“서효 씨.”
그제야 여자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무얼 그리 찾고 있습니까.”
“흐르는 물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여기 온 게 불안합니까.”
“그건 아니예요.”
“서효 씨. 그런데.”
“그런데라뇨.”
“암자에 정말 무상스님이 계실까요. 사실은 아까부터 그 점이 궁금했어요.”
“계실거예요.”
“그렇다면.”
정 검사는 바로 얘기하지 못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상스님을 만나고자 하는 여자의 꿈을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정 검사의 팔을 끌다시피 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뭐예요.”
“봉암사 관리실에서 무상스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관리실 사람이 노스님 이름까지 어찌 다 알겠어요. 소임을 맡고 있는 젊은 스님이라면 모르지만.”
“원주스님에게 확인을 해보고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여자가 갑자기 도리질을 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저는 무상스님이 진즉 떠났다고 해도 월면암을 오를거예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원주스님한테 무상스님의 안부를 묻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서효 씨는 지금 불안해 하고 있군요.”
“그럴지도 몰라요. 그래서 계곡물에 마음을 달래고 있었어요.”

월면암 가는 길은 용추동천을 따라가다 계곡물이 둘로 갈라지는 지점에서왼편으로 가야 하는데, 가파르기 이를 데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지레 겁을 주는 산길이었다. 더구나 희양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를 벗어나, 오르는사람이 스스로 산죽이나 숲을 헤치며 전진해야 하므로 더욱 힘든 산길이라는 것이었다.

여자와 정 검사는 용추동천을 따라 올라갔다.
길은 소문대로였다. 이정표가 있는 등산로를 벗어나면서부터는 밀림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의 산길이 희미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산죽이나 잡풀이 웃자라 있어 이 길이 맞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드는 것이었다. 정 검사는 대학시절 학보사에 있으면서 틈틈히 등산반원들을 따라 다닌경험이 있었으므로 다행히 길을 잃지 않고 감각에 의존하여 올라갔다. 정검사는 그때 겪은 체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랬다. 등산 경험이 없는 여자가 이런 산길을 혼자 오른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벌써 지쳐 있는지 얼굴이 벌개져 헉헉거렸다.
“쉬었다 가요. 현기증이 느껴져요.”
“많이 올라왔네요. 저 아래 계곡 좀 보세요.”
계곡의 원경을 보니 비로소 용추동천이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하얗게 그어진 계곡이 마치 용이 꿈틀대는 듯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산의주봉(主峰) 옆으로 이어진 산자락은 봉황이 날개를 막 펴려는 것처럼 유장하게 보였다.

“자, 다시 오릅시다.”
“어머, 정 선생님. 저기 옹달샘이 있어요. 목을 좀 축이고 가요.”
마침 정 검사도 갈증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옹달샘 앞에 이르러 풀썩 주저앉았다.
돌돌돌.
옹달샘에 대나무 홈통을 받쳐 놓아 물이 돌돌돌 소리를 내며 넘쳐 흐르고있었다. 시원하기도 하려니와 단맛이 나는 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거짓말처럼 산허리 저쪽으로 물이 소나기처럼 세차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런 고지에 물줄기가 쏴아 소리치며 떨어지고 있다는 게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여자와 목을 축인 다음, 그쪽으로 돌아가 보니 과연 가슴 서늘해지는 풍경이 다가서 왔다. 물줄기 하나가 절벽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물줄기는 조그만 소(沼)를 거쳐 소나무 숲 사이로 재빨리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부근에도 작은 계곡이 하나 있는데, 숲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옹달샘부터는 산길은 급경사의 돌계단이 시작되었다. 정 검사는 힘이 더욱 들었다. 여자가 다시 지쳐 돌계단을 오르지 못하므로 정 검사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끌어올리곤 했던 것이다.

“다 왔어요. 서효 씨, 힘내요.”
빗자루질이 돌계단의 흙에까지 나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암자를 비우지않고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굴까. 비질을 한 사람이 바로 여자의 아버지인 무상스님일까. 아니면 무상스님의 상좌라도 되는 것일까.
정 검사는 힘을 내었다. 여자의 손을 놓고 좀더 빠르게 돌계단을 올라갔다. 그가 찾는 무엇이 암자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뎅그랑뎅그랑.
암자는 아주 작았다. 지붕도 기와가 아니라 양철로 덮여 있는 말 그대로토굴 같았다. 풍경도 아주 작아 잔바람에도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정 검사는 여자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님을 불렀다.

“스님, 계십니까. 스님, 계십니까.”
토방에는 겨울철용 운동화가 한켤레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시 또 스님을 부르자, 수염을 깎지 않은 중년의 스님 한명이 뒤안에서 빗자루를 들고나타났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자가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무상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무상스님이 있다는 말인지 없다는 말인지 분간하기 힘든 말투였다. 스님이 다시 말했다.

“전 무상스님을 모시고 있는 상좌입니다.”
“스님, 무상스님은 어디 계십니까.”
“거사님도 성미가 급하십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턱수염이 거뭇거뭇한 스님은 성격이 유들유들했다. 무상스님을 급하게 찾는 여자와 정 검사를 놀리듯 계속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우선 마루에 좀 앉으시구려. 저 청산을 바라보십시오. 말이 절로 쉬어집니다.”
그제야 두 사람은 마루에 걸터앉아 주위를 바라보았다. 좀전에 보았던 옹달샘이나 폭포는 보이지 않았다. 용추동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산의 능선이 더욱 생동감있게 펼쳐져 보이고 있었다. 봉황이 힘찬 날개짓을 하며 곧승천할 것만 같은 장관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산세에 눌려 말을 못하고 있자, 스님은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다시 쓸었다. 빗자루질을 하는 것이 오직 자신의 할일이라듯.
“스님, 무상스님을 빨리 뵙고 싶습니다.”
“허허허.”
그래도 스님의 딴청은 여전했다. 정 검사가 다시 불러보지만 스님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청산을 바라보라니까요.”
스님은 이제 아예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고, 대꾸도 않은 채 빗자루질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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