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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아 [7]

기자명 노명신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연성은 어제 내전의 조심스런 부름을 받고 궁에 들었었다. 중전마마에게 태기가 있다는 말이었다.

중전이 한달 남짓 전부터 통 식사를 못하더니 결국 아기가 들어섰기때문이라는 전의의 진단이 나왔던 것이다. 아들이 없었던 터라, 중전은태기가 확실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다가 이내 자수궁주지 연성스님에게 가마를 내어 불러들였다.

지금 왕대비께서 중전으로 계실 때에는 연성은 가끔씩 궁으로 불려들어가곤 하였다. 그러나 가마를 내지는 않았었다.

요즘은 달랐다. 스님의 처지로 가마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승려의 도성 출입은 물론이거니와 궁궐 출입은 꿈도 꿀 수 없는 세상이었으므로 연성은 하는 수 없이 울긋불긋한 꽃가마를 타고 은밀히 입궁을하였다.

천하의 재상들이 아무리 철저하게 승려의 출입을 막는다 하여도 내전에 들어가는 가마까지 뒤져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아무리 척불이심해도 옛부터 궁궐내의 아낙들에게는 오히려 부처님을 섬길 수 있는기회가 바깥 세상보다 더 많이 주어지는 편이었다.

중전은 연성스님에게 부디 원자를 낳을 수 있게 빌어달라는 부탁을간곡하게 하였다. 젊고 곱기만 한 중전에게 아직은 위엄스러운 표정은드러나지 않았다. 그렇다하여도 역대로 원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의 비극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 중전이었다.전의의말이떨어지자마자어떠한노력을기울여서라도왕자를낳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을보아도 그랬다.

연성은 중전에게 매일 조석으로 불공을 들여 왕자 탄신을 빌어드리겠다는 약속을 한 뒤 물러나왔다. 중전은 일어서서 나오려는 연성에게 우선 비단 서른필과 쌀 서른 가마를 내리겠다고 말했다. 사실 요즘같은때라면 아무리 많은 돈보다도 쌀가마가 더없이 귀한 물건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연성은 우선 비단은 가마꾼에게 지우고 쌀 서른 가마는 하루 이틀 내에 인편에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연성에게는 이번일이 부처님의 특별한 가호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근근이 연명이나 하면서 살아오던 터에 쌀 서른 가마라니… 뿌듯한 안도감이 일었다. 쌀 조금에다가 여러가지 곡식을 섞어서 밥을 지으면 그래도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곡식은 비단을 팔아서 사 들이면 되겠고…

연성스님은 아마도 오늘 해거름 안에는 내전으로부터 쌀가마를 실은인부들이 도착할 것이라는 생각에 흐믓해 하면서 햇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방바닥의 먼지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집어내고 있었다. 입춘이지난지도 벌써 사흘이고 고드름도 저렇게 힘없이 녹아내리고 있으니 아무리 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곧 따뜻한 봄이 올 것이다.

열흘만 지나면 또 다시 새해가 돌아오는데, 새해에는 부디 풍년이 들었으면 좋으련만, 하고 푸념을 하다가 연성스님은 승병(승병)생각을 해냈다.

옛부터 해마다 새해가 되면 절에서는 승병이라는 떡을 빚었다. 그리고 설날에는 스님들이 법고를 치면서 집집을 방문하여 염불을 하고 떡을 나누어 주는 것이 일종의 풍습이었다. 그러면 받는 사람들이 여기에보답하는 뜻에서 돈이나 물건을 주곤 했는데 이것을 모아서 스님들의살림살이에 보태 쓰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풍습은 엄두도 못낼 지경이 되었다. 떡을 빚을 쌀도 없거니와 스님들의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있으니 집집을 방문하면서 법고를 치기는 커녕절 밖을 나서기도 힘든 일인 것이다.

그래도 생활이 많이 궁핍할 때는 때때로 하인들을 시켜서 내전이라든지 또는불공을 부탁해오는 사대부가의 부인들에게 승병을 보자기에 싸서 은밀히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 수일내로 승병을 잘 받았노라는 답신과 함께 약간의 물건이나 돈이 전해져 오므로 요긴하게 쓰이는 때가 많았다. 이런 일들은 물론 밖에서는 모르게 진행되었다.



글 노명신 삽화 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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