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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본사 순례 2-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기자명 이창윤
  • 수행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민중과 함께 한 선강(善講) 중흥 도량

백제 위덕왕대 검단 스님 창건…'해동의 달마' 백파 스님 주석
교육·포교 도량 거듭나기 한창…동학운동 중심지로 유명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 <선운사 동구>


봄이 무르익어 갈 4월쯤이면 하나 둘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고창선운사 동백나무숲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하고, 다녀온 이는 다시가고 싶어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 고장 출신 시인인 미당의 시구절을 통해서, 또는 가수 송창식의 노랫가락을 통해서 선운사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禪雲寺)는 그렇게 우리에게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게 하는 절이다.

선운사는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는 선운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지금은 도솔암, 참당암, 동운암, 석상암 등 산내 암자와 고창.부안 지역의 40여 개 사찰은 관할하고 있지만 한때는 1백89동의 전각과 89곳의 산내암자를 거느린 거찰이었다.

선운사의 창건은 1천4백여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건과 관련된 설화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백제 위덕왕대의 고승 검단(檢旦, 黔丹) 스님이용추(龍湫)를 메워 그 자리에 선운사를 창건했다는 설이 하나이고,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내주고 말년에 이곳에서 수행하다가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중애사를 세웠는데 이 절이 선운사의 시초라는 설이또 하나이다. 도솔암 못미쳐 남아있는 진흥굴이 진흥왕이 수행하던 동굴로전한다.

두 기록 모두 창건 당시의 기록이 아니어서 정확히 단정짓기는 어렵지만,고창지역이 백제의 영토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검단 스님의 창건설이 더욱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여진다. 검단 스님은 진흥왕의 국사이자 그의 도움을받아 참당암을 창건한 의운 스님과 선운산의 산신이 되어 선운사를 지키겠다고 서원해 산신각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선운사의 초창(初創) 이후 내력은 조선 초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잘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공민왕 3년(1354)에 효정(孝正) 스님이 중수하는 등초창 이후 그 법등이 면면히 이어져 오다 조선초에 이르러 폐허화된 것으로보인다. 선운사의 중창은 성종 3년(1472)에 극유(克乳) 스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스님은 이곳을 지나다가 뜰에 9층 석탑만이 외롭게 서있는 것을 보고중창을 발원하고 성종의 작은아버지인 덕원군의 발원문을 얻어 10년간의 중창을 시작했다. 이때 이루어진 건물이 어실(御室)을 비롯해 장륙전(丈六殿)과 관음전, 천불대광명전(千佛大光明殿), 금당, 지장전, 능인전(能仁殿) 등1백89동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어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 이후 광해군 5년(1613)에 무장현감 송석조와 일관(一寬) 스님의 노력으로 대웅보전과 상하 누각, 동서 양실(兩室) 등을 건립했는데 이 때의 중창이 현재 선운사의 가람 규모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창건되고 중창돼온 선운사는 그 긴 역사만큼이나 뚜렷한 성격을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에서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영호 정호(映湖鼎鎬, 1870∼1948)로 이어지는 강맥(講脈)이고 또 하나는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호흡해온 민중지향적 성향이다.

선운사의 강맥은 설파 스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스님은 조선시대 화엄학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장현(고창 지역의 옛지명) 출신으로 19세의 나이에 선운사에서 희섬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서산 휴정 스님의 문도 중에서도 가장 번성했던 편양 언기 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스님은 서산 스님의 7세손이 된다.

스님은 특히 화엄교학에뛰어났는데 당시까지 화엄학의 연구 지침서가 되었던 중국의 청량 스님의《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 )》 90권을 교정하여후학의 길잡이가 되도록 했다. 스님의 부도와 비가 선운사 초입의 부도전에있다.

백양산 운문암과 구암사 등에서 선강법회(禪講法會)를 열어 선문의 중흥에 큰 발자취를 남긴 백파 긍선 스님은 설파 스님의 증손제자다. 스님 역시무장현 출신으로 12살 때 선운사에 출가해 설파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화엄과 선을 겸수하는 가풍에 따라 화엄학과 선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율을 함께 수학한 율사이기도 했다.

스님은 한국다도의 정립자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과 선문의 요지에 대한 토론을 벌여선문의 종지를 돌아보게 했으며, 추사 김정희와도 교분을 나눠 그로부터'해동의 달마'라는 격찬을 듣기도 했다. 선운사 입구에 있는 스님의 비는추사가 짓고 직접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속명이 박한영(朴漢永)으로 널리 알려진 영호 스님은 전주출생으로 어머니가 위봉사에서 듣고 온 생사법문에 감동을 받아 19세에 전주 태조암으로출가했다.

세수 30세 이전에 백양사와 선운사, 구암사, 대원사 등에서 명강백으로 이름을 떨친 스님은 고등불교강숙, 불교중앙학림의 강사 등을 거쳐1931년 중앙불교전문의 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후진양성에 힘썼다. 금봉.진응 스님과 함께 근대불교 3대 강백(講伯)의 한분으로 추앙받았던 스님은 시와 문장에 뛰어났음은 물론 서법(書法)까지 능통한 고승으로 평가받았다.스님의 강맥은 운기.석문.석농.운허.운성 스님에게 이어져 현대 한국불교의대강맥을 이루고 있다.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한 선운사의 민중지향적 성격은 창건 당시의 설화와 선운사를 비롯한 산내암자에 남아 있는 삼장신앙(三藏信仰)과 그리고 동학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동불암 마애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검단 스님이 선운사를 창건할 당시 선운산 지역은 도적들의 소굴이었다고한다. 스님은 선운사를 창건하면서 그들을 교화하고 다시는 나쁜 일을 하지않도록 소금과 한지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는데, 양민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 나가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안정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30여 년 전까지 만해도 사하촌에는 대규모의 한지공장과 닥나무밭이 있었다고사내 대중들은 전한다.

또, 스님의 교화를 받은 도적들과 그의 후손들이 은혜에 보답하고자 직접 생산한 소금을 '보은염(報恩鹽)'이란 이름으로 봄.가을로 절에 보내왔다고 한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선운사 인근의 해리면에 있는 삼양사염전에서는 매년 절에서 사용할 소금을 보내온다고 한다.한지와 소금은 조선왕조때까지만 해도 국가의 전매사업이었다. 그런 사업을가장 최하층민이라 할 수 있는 도적들의 재활방편으로 가르쳤다는 것은 검단 스님의 불교사상이 민중지향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운사 관음전과 도솔암 도솔천내원궁, 그리고 참당암 약사전에는 각기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들 세 보살상은 각기 천장보살과 지장보살,인장보살을 의미한다고 한다. 삼장신앙은 천(天).지(地).인(人) 삼재사상(三才思想)을 지장신앙에 결합시킨 것이다.

선운사 주지 혜산 스님은 "이삼재사상은 천과 지와 인의 평등과 공존을 의미하는 사상"이라며 "이를 통해 선운사가 검단 스님의 민중지향적 불교사상이 뿌리내린 민중신앙의 본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도솔암이 동학운동의 중심지였던 사실도 이같은 성격을 밝혀주는 또하나의 근거가 된다. 혜산 스님은 "도솔암은 고창.고부 등지의 민중을 모으는동학운동의 중심지였다"며 "이곳을 중심으로 동학의 접주가 활약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검단 스님이 조성했다고 전하는 동불암 마애불도 동학운동과도솔암의 관계를 파악케 해주는 유물로 꼽힌다. 동학운동 당시 이 마애불의배꼽에는 만민을 평등하게 하는 검단 스님(또는 미륵)의 비기(秘記)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동학의 접주 손화중의 집에 모인 오하영을 비롯한 동학도들이 그 비기를 꺼내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비결을 꺼내는데 동참했던 오지영이 쓴 《동학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건이 있은 후몇 달 사이에 손화중의 포에는 수만 명의 새로운 교도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또, 동불암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위에는 앞에서 언급한 도솔천내원궁의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혜산 스님은 미륵불이 머무는 도솔천 내원궁에지장보살을 모신 이유를 "지장보살이 이루고자 하는 정토세계나 미륵이 이루는 용화세계는 민중을 평안토록 하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합치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빈부귀천이 없어지고 계급의 차별이 없는 정토의 세계가 지장보살이 염원하는 정토세계이고 미륵이 이룩하고자 하는 용화세계라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불교 강맥의 큰줄기를 이루고 민중과 호흡하며 1천4백여 년의역사를 헤쳐온 선운사는 옛전통을 오늘에 잇기 위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사하촌에 소작을 줘 거둬들이는 1백여 가마의 쌀이 수입의 전부였을 만큼 재정이 빈약해 옛전통을 이어갈 선원과 강원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던 선운사는 지난해 하안거부터 참당암에 도솔선원을 개설해 설파 스님과 백파 스님의 선풍을 오늘에 진작시키고 있다.

또강맥의 부활을 위해 강원의 재건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중생과 함께 했던전통을 잇기 위해 포교에도 힘쏟고 있다. 전라도 지역이 타종교의 교세가강한만큼 정법을 호지하고 지역민들에게 불법을 홍포하기 위해 포교당을 개설운영하는 등 대중과 함께 하는 포교도량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혜산 스님은 "선운사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재정이 빈약하다는 것"이라며 "그러나 강맥과 선맥을 잇고 대중과 함께 호흡해 나가기 위해 교육.포교도량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선운사가 민중과 함께 호흡을 해왔던만큼 민중과 호흡하는 포교도량으로 갖춰나갈 것"이라며 "사부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바란다"고 말했다.


이창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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