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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窓에 부는 바람-30일간 전쟁

기자명 오성 스님
방학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까만 단발머리의 윤경이가 아침 예불에 참석했다. 예불이 끝난 뒤에도 아이는 혼자 남아서 백팔 배를 하고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가해서 물어보니, 동생의 잘못으로 다투게 되었는데 정작 어머니에게 혼이 난 것은 자신이라는 것이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잠을 못 이뤘는데, 언젠가 법회시간에 스님이 잘못을 하거나 화가 나면 백팔 참회를 하라는 말씀이 생각나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 아이가 적군에서 파견한 스파이인 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시작된 방학, 아침 예불시간에 맞춰 하나 둘 아이들이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열에서 이십 명씩 떼지어 몰려왔다. 아침예불도 4시에서 5시로 옮겼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들은 삽시간에 절을 장악했다. 그리고 최후 방어선인 목탁까지 빼앗아 갔다.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 되었고, 그날 이후 아이들의 공격은 절정에 달했다. 방학 숙제도 할 겸 집에 갔다오라고 하면 방학 숙제거리를 아예 들고 왔고, ‘해수욕’을 자신들의 휴식 시간이라며 정해놓고는 ‘어린이의 안전을 위해서’ 내가 앞장설 것을 요구했다. 결국 난 눈동자와 그나마 흰 이만 남기고 온 몸이 까맣게 되었다.

하루는 덩치 큰 승호가 봉숭아꽃물을 들이고 왔다. 아이들의 비난 속에 난 승호의 편을 들었다. 그날 저녁, 내 손발톱은 아이들에 의해 랩으로 포박되어 ‘꽃물들이는’ 고문을 감수해야만 했고, 다음날은 ‘투명 매니큐어’고문까지 가해졌다. 또 어쩌다 조그만 실수를 해도 청문회를 열어야 했다.

견디다 못해 도반스님과 의논 끝에 27km나 되는 성산포까지 고난의 행군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앞서갔다. 다음날에는 한라산을 재도전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지리산까지 가자는 아이들의 주장에 설득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백기를 올렸고, 아이들은 지금 지리산에 갈 여비를 마련한다고 통장을 만들었다.

이렇게 방학은 끝나가고 해방의 날이 멀지 않았다. 아이들은 차츰 절 생활을 통해 함께 생활하는 법을 배우고, 말없이 걸으며 생각에 잠길 줄도 안다. 조그만 벌레에도 애정을 쏟고, 가지 끝에 매달린 새싹의 성장에도 관심을 가질 줄 안다. TV보다 윷놀이를 재미있어 하고, 놀던 자리는 스스로 청소하고 양말정도쯤은 빨아 신을 줄도 안다. 그러나 정작 나는 모르겠다. 아이들이 나를 닮아 가는 것인지 내가 아이들을 닮아 가는 것인지를.


오성 스님/제주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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