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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어울문화원 자연스님

기자명 박연진

"마음은 함께 어우러질 때 열리죠"

원장 자연스님. 스님은 이제는 원장이라는 직함에 많이 익숙해졌다. 수행자이기 때문에, 또 음악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직함이나 소임으로부터 멀어지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지만, 요즘엔 어울문화원 원장이라는 자리가 새삼 크게 여겨진다. 1년만, 이번까지만 하면서 꾸려온 10년의 세월, 그 인연의 질김도 그렇거니와 제법 깊어지는 어울문화원의 소박한 향기가 고맙기도한 까닭이다. 특히나 이른 오후면 의례 찾아드는 개량한복을 입은 30여명의개구장이들은 스님의 발목을 더욱 단단히 붙잡는 푸른 영상이다. 거칠게 뛰어놀 아이들이 두손을 어설프게 차수까지 하고 큰절을 넙죽하며 “선생님.차 한잔 주세요.” “선생님 대금 가르쳐주세요” 하면 스님의 마음은 오갈데 없이 소르르 녹곤 한다.

어울문화원은 수원에서 꽤 이름이 난 곳이다. - 대금을 기가 막히게 가르쳐주는 곳이다. 차를 마시는 곳이다. 다도를 배울 수 있다. 그곳의 원장선생님이 중요무형문화재 제 45호 대금산조 준보유자다. 그곳의 원장선생님이스님이다. - 우리문화쪽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이런 입소문을 통해 어쩔 수 없이 어울문화원을 알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울문화원을 자리매김하는 소문은 좋다! 편안하다 ! 뿌듯하다!는 회원들간의 꽉찬 자랑이다. 랩이나 따라부르고 메이커 옷을 찾을 나이의 아이들도 어울문화원에 오면 자연스럽게 우리가락에 젖어들고, 아이들 성적에만 급급하던 부모님들도 이곳에 오면 넉넉한 인생 설계를 다시금 해보게 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제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함께 어울리는거죠.그리고 어울리고자 하면 절로 어울어지는게 바로 우리 문화거든요. 대금 불고, 차 마시고 ,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달라지게 되고 …그런 곳이 바로 우리 어울문화원입니다. 만남의 장소랄까요.”

어울문화원의 강좌는 다양하다. 대금반, 단소반, 다도반, 도자기반 , 어린이 선비반, 꽃꽂이반, 화가반 등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그중 제일 앞장서서 달리는 반은 아무래도 대금반이다. 웬만한 어른도 한손에 다부지게 들기가 편치 않은 대금이지만, 어울문화원에선 어린 회원들까지 거의 개인 대금을 하나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애착이 크다. 고사리만한 손가락으로 씨름을 하면서도 아이들은 대금을 포기하지 않는다. 게다가 대금은 첫소리를 내기까지도 시간이 걸리는터라 배우는 이들의 마음은 조급하지만 하다. 하지만 스님은 모든 것을 자연스러운 이치로 돌린다. 대금이라는 묵직한 느낌을친근하게 갖도록 해주고 , 배우는 이들의 손가락이 잘 미치지 않는 곳에는스카치 테이프를 붙여주면서 쉽게 갈 수 있는 방편을 함께 모색해준다. “전통악기. 우리 문화. 다도 … 그 이름들이 주는 무게가 너무 무겁지 않습니까? 전 생활속의 문화로 모든 것들이 녹여졌으면 해요. 그래야 남에게 보여지는 문화가 아니라 즐거운 생활문화로 우리것을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그 생활문화 가운데 스님이 가장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전해온 것이 바로 차문화이다. “우리 차를 즐겨마십시다.” 이 간단한 한마디를 스님은 15년이 넘도록 반복해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어울문화원이라는 고정 공간이 생겨서 강의도 하고 , 차문화유적지 여행도 쉽게 떠나지만 옛날에는그야말로 열정 하나로 뛰어다녔다. 어울문화원과 인연을 맺기 전부터도 스님은 입광고를 해서 차문화 유적지 여행을 주도해왔다. 하지만 이 엉성해보이고 불규칙적인 차문화 여행에 고정 팬이 생겼다. 스님이 일이 바빠서 못갈 때면 독촉 전화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다 수원에 어울문화원 문을 열면서 스님은 아예 본격적으로 차문화 보급을 시작했다. 우선 스님은 수원시내의 전통찻집이란 찻집은 다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차를 다루던 곳은 단 한곳 밖에 없었다. 그길로 스님은 지리산 차를 한보따리 구해다가 전통찻집 주인에게 안겨주며 다도에 대해 일러주었고, 차츰 관심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뜻하지 않게 다도 강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실로지금은 차를 파는 전통찻집이 수원 시내에만 20여곳이 된다. “차를 나누는마음. 참 조용하고 좋지 않습니까? 이제 사람들은 저만 보면 차 한잔 하죠? 하고 인사를 해요. 전 그 인사가 제일 반갑습니다.”

이곳에서 자연스님은 선생님으로 통한다. 스님 스스로 스님임을 내세우지않는 것이 그 한 이유이다. 밖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대금산조 준보유자 이청훈으로 더 유명할 정도이다. 비승비속. 그러나 스님은 고개를 흔든다. “저는 스님입니다. 다만 내가 스님이라고 내가 수행자라고 사람들에게 부러강요하지 않을 뿐입니다. 나에게 대금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를스승으로 생각할테고 연주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음악가로 볼테고 또 절에서 본 사람은 저를 스님으로 보겠죠. 그들 각자의 생각을 제가 처음부터 고정해놓고 싶진 않은 겁니다. 다만 음악이던 차던 어떤 만남이건 지속되다보면 서로 불연으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해남 대흥사로 차 문화 여행을갔을 때였다. 스님은 여행사 가이드 마냥 차 안에서 차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일지암에 얽힌 차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그러다 새벽 3시경 대흥사 앞에 도착했다. 스님은 일지암에 오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니 대흥사에 들어가 새벽예불을 하겠다며, 내키는 사람만 따라오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혼자만 남아 있기도 그렇고, 또 갑자기 가사 장삼까지 다 수한 스님의 모습에 취해서 얼떨결에 대흥사로 들어섰다. 그들 가운데는 그저 여행이려니 하면서 따라왔던 기독교인들, 무종교인들이 많았다.하지만 그날 그 새벽의 산사의 모습으로 그들은 불연을 맺었고, 스님 나름의 포교관을 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억지로 강요하고 얘기로만 오가는그런 포교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활속에서 절로 이끌어주고 이끌려오는그런 포교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 문화도 마찬가지구요. 그런 속에서사람들이 물어와요. 스님 ! 불교가 어떤 거예요? 저는 그때 말을 해줍니다.제가 생각하는 포교는 그런거예요.”

어린 시절 우연히 들은 단소가락을 좇아 이생강 선생님 문하로까지 찾아든 우리가락의 길. 이생강선생님 문하에서 갈고닦은 9년 긴 세월 , 그때 스님은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음악에 대한 자부심을 알리자, 민족음악을 알리는 기수가 되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스님은 다소 별난 삶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수배령이 떨어진 운동권 음악가. 민족음악가. 그리고 마침내 스님이 되었다. 삶의 질곡이 깊었던 탓일까? 스님은 남들이 어떻게 보는가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다. 대금 연주가 이청훈으로 보던, 자연스님으로보던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스님이 진정으로 마음 졸이는 것은 스스로에게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바른 수행자인가? 하는 매서운 자문의 거울. “기예는 수행자가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저는 기예만 뛰어난 스님이고 싶지 않습니다. 수행자이고 싶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음악, 문화원, 이 모든 것이 그 하나의 여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구요.”

스님은 즉흥연주를 즐겨한다. 정해진 악보를 따라 연주하기보다는 마음속의 리듬을 따라가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맑은 성음과 거친 성음의 조화를 특색으로 하는 스님의 대금소리. 하지만 스님이 추구하는 음악의세계는 멀고 멀다. “궁극적으로 제가 꿈꾸는 세계는 악기를 여읜 세계입니다. 악기 없이도 음악을 연주할 수 있고, 또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음악이 되는 그런 마음의 세계 말이죠. 그러면 전 연주 안할거예요. 우리의 말, 우리의 웃음, 자동차소리까지 다 음악인데 음악이 왜 따로 필요하겠어요.”

어울문화원을 가득 매운 학생들의 어슬픈 대금소리들. 그 복잡함속에서도스님은 조용하게 웃는다. 그렇게 스님은 이미 소음을 여읜 조그만 세계를이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취재수첩
자연스님의 동그란 안경은 첫눈에 특이한 스님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게다가 퍼포먼스 협회 회원 등등의 낯선 경력들을 보면 그런 선입견이 더욱 확고해진다. 대금산조 준인간문화재이면서 더구나 스님인 그가 퍼포먼스를 한다니 듣기만해도 상상이 안가는 대목이다.

퍼포먼스. 스님. 대금.
어느것 하나 박자가 딱 맞질 않는 느낌. 하지만 자연스님에게 있어서는이 세박자가 퍽 잘 어울린다. 스님에게 이 모든 것은 자유에 대한 추구로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고의 자유로움, 형식의 자유로움.

“지금 제가 온전히 자유로와졌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부지런히 노력하는거예요. 자유로와지기 위해서.”

그러나 스님은 그 자유를 향한 여정에서 절대 놓쳐선 안되는 것 하나를짚었다.전통에 대한 예, 서로에 대한 예, 사람에 대한 예, 스스로에 대한 예가 그것이었다. 자유와 예. 요즘의 우리가 가장 멀리 놓아두고 있는 두 지점이 아닐까.


박연진/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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