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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순례-범어사 강원

기자명 박연진

“우린 옛날 방식이 더 좋아요” 옛 전통 ‘뚝심’고수

일주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바람탄 댓잎소리가 우수수 발치에 떨어진다. 먼빛으로 언뜻 대밭이 예전보다 많이 야위었다 싶었는데, 그래도 이곳 범어사의 가을은 여전히 그들의 음성으로 깊어가고 있었다.

오후 2시. 조용하던 산사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혜행당 앞 은행나무가 그 진원지. 범어사 가을맞이 울력 중 가장 큰 울력인 은행따기가 시작된 것이다. 40명 학인 스님 총 출동. 게다가 이번에는 최신장비라 할 수 있는 기중기까지 동원됐다. 스님들은 교대로 기중기를 타고 올라가 긴 장대로 꼭대기에 매달려있는 은행 한알한알까지 알뜰하게 거두어 들이며 연신 웃는다. 노동의 기쁨·수확의 기쁨, 거기에 학동들만의 장난기와 건강함까지 어울린 은행따기 울력은 말 그대로 나눔의 현장이었다. 수확량은 지난해의 두배가 넘는 25가마니로 그야말로 대풍년. 스님들은 겨울살림이 든든해진 듯 여간 뿌듯해하지 않는다.

“먼저 사중 어른스님들께 올리고 나면 그 나머지가 저희들 겨울 내 간식이 됩니다. 아침마다 강주 스님하고 강사 스님들께 일곱여덟알씩 꾸버(구워)드리고 나서 저희도 다 같이 어울려 몇알씩 먹는데, 한 겨울에 은행 꾸버(구워)먹는 맛은 그만입니다.”

범어사 은행이 유난히 맛있다며 한 학인스님이 입을 열자 갑자기 몇몇 스님들이 “너무 맛이 있어서 문제죠”하며 몇년전 있었던 은행에 얽힌 사건을 들려주었다. 사건의 전모는 추수한 은행을 다듬어 어른스님들께 드릴 분량을 따로 담아놓고 나서 한두 알 맛을 보다가 시작되었다. 한창 식욕이 왕성한 학인들이라 그만 먹어야지 하면서도 손은 계속 갔고 몇 스님은 양이 다 찰때까지 끝끝내 다 먹었다.

몸에는 좋으나 독한 기운도 가지고 있는 은행을 너무 먹었던 탓에 최후의 멤버였던 스님 몇몇은 급기야 병원에 실려갔고 그 다음날 신문에 그들의 기사가 났다. 기사 대략의 내용은 범어사에 먹을 것이 없어 수행자들이 은행으로 허기를 채우다 탈이 났다는 얘기였다. 강원에서나 있을 법한 이 엉뚱한 사건은 강원 겨울 살림 내내 파랗게 익어든 은행알과 어울려 훈훈한 담소로 꾸며질 것이다.

사실 범어사 강원은 다른 강원에 비해 울력이 적은 편이다. 학인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베풀어준 사중의 배려 덕분이다. 하여 치문반을 지나고 나면 그리 하루 일과가 바쁘거나 고되지는 않다. 한가로운 가운데 부단한 정진만이 범어사 강원의 주요 과제라 할까. 그래서인지 범어사 강원의 움직임은 퍽이나 단조롭다. 서예반이라던지 컴퓨터 반, 그 흔한 다도반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강의와 자율적인 공부가 강원 생활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학인들 그 어느 누구도 불만스러워 하거나 아쉬워하진 않는다. 경공부, 마음공부, 습의 익히기 그 이상 강원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저희 강원은 다분히 보수적입니다. 다도, 서예, 컴퓨터… 이런 것들은 강원에서가 아니어도 배울 수 있지만 경공부, 마음공부, 수행자로서의 습의는 이곳에서가 아니면 그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공부도 내전만을 고집하고 있고 그것도 원전강독을 중시합니다. 전통강원으로서의 맥을 잇는 것, 강주 스님의 확고한 뜻이기도 하지만 저희들도 그 점에 있어 오히려 자부심을 느낍니다.”

전통을 잇는 것을 두고 보수적이라고 한다면 범어사 강원은 기꺼이 보수적이라고 표현하겠다는 찰중 스님의 담담한 표정엔 그들만의 자긍심이 담겨있었다. 범어사 강원 4년동안 그들은 마음의 일을 줄이는 법을 그렇게 익혀가는 듯 했다.

범어사 강원의 울타리는 남다른데가 있다. 너무 널직하게 쳐져 있는 듯도 하고 어찌보면 너무 촘촘하게 세워져 있기도 한 그런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강압적이지 않아요. 그야말로 기본적인 청규는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그외 해라, 마라… 하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긴장하다보면 오히려 공부에 전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배려를 해주시는 것 같아요.”

이러한 분위기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단연 강주 스님과 강사스님들이다. 학인들과 수시로 탁구 경기를 하며 언제나 일등의 자리를 고수하는 강주스님을 비롯해 방 한켠을 학인들에게 점령당해도 웃음짓는 학감 스님과 강사 스님들, 그리고 날씨가 유독 좋은 날엔 거침없이 야외수업! 자연학습!을 외치며 포행을 나서는 중강스님. 학인들에게 그러한 스승은 더없이 다감한 선배이며 은사이기에 그들의 마음에 담긴 참뜻까지도 놓치지 않고 헤아린다. 좋은 수행자가 되라는 ….

하지만 자율만큼 어려운 울타리가 어디있을까. 자연 학인들은 널직하게 주어진 시간을 스스로 운영하는 법을 익혀야 했고 그것은 가장 파워있는 범어사 강원만의 울타리로 촘촘하게 엮어져 왔다. 40명의 도반들 각자의 모습이 서로를 가장 긴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범어사 강원 생활은 한편 편하기도 하겠지만 실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스스로 절제하고 정진하지 않으면 도반들 눈치가 보이니까요. 그러니 게으름을 피우거나 나태심을 내면 도저히 견디질 못하게 되는 겁니다.” 한 치문반 학인 스님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면 좌선하고 있는 도반들의 모습이 죽비처럼 가슴을 친다고도 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통해 스스로를 반조하며 수행자로서 거듭나고 있었다.


박연진/방송작가



■범어사 강주 덕민 스님

“잘 왔어. 그런데 그냥 쉬었다만 가요. 강원 얘길랑 알려고 하지 마. 요즘 뭐든지 세상에 드러내려고만 하잖아. 가만히 지켜봐 줄 것은 그대로 지켜봐주는게 최고야. 괜히 뒤적이다 낙옆밑에 통통하게 살오른 새순만 다칠 수도 있어. 전통강원의 맥이 요즘 너무 흔들려 걱정인데…”

강주 덕민 스님은 이렇게 말문을 떼었다. 대강백이셨던 강고봉 스님과 우룡 스님의 적손으로 한평생 공부와 후학양성에 전념해온 스님으로서 마음에 담아둔 얘기가 많은 듯 했다. “강원은 수행자들이 공부하는 곳이야. 수행이 뭐야, 한번에 뚝딱 하면 되는건가? 그런데 경공부가 자꾸 어렵다면서 번역본만 보려고 하는지 몰라. 수행자가 어떻게 노력도 안해보고 포기를 해. 한자 한자 알아가는 맛. 도무지 모르겠는 맛.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뜻. 경전은 그렇게 알아가는거야. 한번에 휙 읽고 다 이해했어… 하는게 아니라구. 이해하면 뭐해 마음으로 알아져야지.”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킨 이만이 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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