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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이종욱 스님 (1884∼1969)

기자명 권오영

조선불교 조계종 창립 주도

69년 11월 3일 입적


근·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한국불교에 있어 지암 스님만큼 지대한 공헌을 한 스님도 별로 없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지암 스님은 현 조계종의 모체가 되는 조선불교 조계종 창립을 주도하는 등 종단의 중대사를 이끌었음에도 친일행적으로 역사적 평가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1884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지암 스님은 13세 되던 1896년 양양군 명주사에서 출가해 곧이어 월정사의 해천월운 스님을 시봉하며 월정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런 가운데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약탈을 강행하던 중 월정사 또한 수십만 정보의 땅을 모두 잃게 될 위기에 빠지자 당시 30세의 젊은 지암 스님은 ‘주지대리’가 돼 탁월한 행정력을 발휘하며 폐사 직전의 월정사를 구하게 된다.

이후 지암 스님은 3.1 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시위에 참가했으며 3월 3일 이탁 등과 27결사대의 일원으로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탁월한 행정력 돋보여

또 스님은 상해임시정부에 참가해 대한적십자회를 조직,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서울로 다시 파견되는 등 국내외를 오가며 항일운동의 최일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그러던 중 스님은 1921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출옥 후인 1923년에는 다시 의열단원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과 연루돼 함흥감옥에서 3년 동안 복역하게 된다.

<사진설명>지암 이종욱 스님(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이 1910년 월정사 부채를 정리한 기념으로 관련인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동국대 종합대 승격 견인

그러나 1941년 초대 조계종 종무총장에 선임된 지암 스님은 히로다 쇼익(廣田鐘郁)으로 개명하고 일제의 대동아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요 및 시국대응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다.

이 같은 이유로 지암 스님은 해방과 함께 발족한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에서 부일협력자 제1호로 지목돼 승권 정지 3년이라는 징계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해 11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구 주석 등이 귀국하면서 ‘이종욱 스님의 자금조달이 없었다면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없었다’고 증언하면서 지암 스님은 징계에서 벗어나 다시 종단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후 1950년 스님은 강원도 평창에서 제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했으며 동국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해 동국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게 하는 밑거름을 다지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근현대 격동기 속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보냈던 지암 이종욱 스님은 1969년 11월 3일 스님의 친일과 항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후인들에게 남겨둔 채 향년 86세, 법납 74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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