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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이종익 박사(1912~1991)

기자명 이재형

불교개혁 앞장-보조사상 선양

91년 11월 6일 입적

1991년 11월 6일, 법운 이종익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불교계에서는 수행과 포교의 모범이었던 선지식이 입적했다며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이 박사는 근대 한국불교학 제1세대로 보조지눌, 보우 스님 등을 비롯해 불교사의 그늘에 묻혀 있던 한국천태종의 역사를 양지로 끌어올렸으며, 종단개혁과 발전에도 헌신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50~60년대 이 박사와 함께 정화에 참여했던 조계종 전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훗날까지도 “법운 거사님은 실로 현대 한국불교사를 위해 큰일을 하셨고, 현대 한국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셨다”며 “고인께선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정력으로 학문과 저술, 불교혁신운동과 포교, 대중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많은 일을 하셨다”고 평가했다.


50∼60년대 불교정화 앞장

이종익 박사는 1912년 음력 사월초파일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성리학에 공부한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세 때 어머니를 돌아가시면서부터다. 인생무상의 큰 충격으로 침식을 잊고 명상에 잠겨 생활하던 그는 마침내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으로 사경을 헤맨다.

이후 금강산 유점사 흥성암에서 관음기도로 다시 건강을 회복한 이 박사는 나머지 생애를 불교에 바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당시 대강백으로 명성을 떨치던 설하, 설호 스님 문하에서 공부했다.

약관 26세에 유점사 강주가 된 이 박사는 이후 현대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임제대학과 대정대학에서 불교학을 연구했다. 또 보조국사의 좬화엄론절요좭를 발견한 것도 이 때다. 이 책을 필사해 송광사에 기증한 그는 이를 계기로 훗날 좥한국불교의 연구-고려 보조국사를 중심으로좦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소설-전기도 10여편 남겨

어쨌든 해방을 1년 앞두고 귀국한 이 박사는 봉은사 강원 강주를 맡으며 후학을 양성하는 동시에 불교중앙청년동맹, 불교혁신회, 대각회 등을 조직해 불교개혁 및 대중화에 적극 앞장섰다. 특히 ‘정화’ 때는 선학원을 근거로 독신승의 편에 섰고, 그해 6월 20일 전국비구승대회를 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또 70~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조계종 종조 문제에 있어 태고보우 스님이 아닌 보조지눌이라는 주장을 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해박함과 문학적 재능은 불교학 연구를 넘어 10여 편의 소설과 전기를 쓰도록 했고, 꺼지지 않은 열정은 학문을 넘어 실천하는 지성의 표본이 되기에 충분했다.

<사진설명>이 박사는 만년까지 교육과 저술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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