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듯 살아온 발자취 일뿐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발빠르게 허무에 대처한다. 때로는 유행가 가사를 읊조리기도 하고 때로는 술을 마신다. 훌훌 털어 버리겠다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기분 전환이니 뭐니 하는 갖가지 방법을 찾는다.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고 달래고 억누른다.
그렇게 하느라고 너무 정신이 없어서 사람들은 허무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허무는 다른 많은 아름다운 삶의 요소들 (죽음, 실패, 병, 늙음 등)과 함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때문에 그것이 삶의 무대에 나타나는 것은 죄악으로 여겨진다.
정말 이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누구나 하는 일이 술술 잘 풀려나가고 있을 때 허무에 빠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일이 잘 되지는 않는다. 어느 일이든 한계 상황이 있게 마련이고 그 때를 기다려 허무가 인생의 전면에 등장한다. 무엇이든 다 해 낼 수 있는 강대한 집착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은 허무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어디론지 사라진다.
사실 허무는 새로운 등장 인물이 아니다. 집착에 의해 이끌려 온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집착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방식인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허무를 그렇게 바라보지 못한다. 무엇인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죽어 가는 것처럼 느낄 뿐이다.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수없이 태어나고 수없이 죽음을 경험했다. 이 수없는 생사의 고통은, 바르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허무의 무서운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처럼 허무의 맑은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성욱 suhamat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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