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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운허 스님 (1892∼1980)

기자명 이재형
이 땅에 나툰 구마라집 화신

80년 11월 17일 입적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향훈처럼 깊고 은은한 게 또 있을까. 특히 한평생 자신을 돌보기보다 다른 이를 위해 살았던 분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불천 운허(佛泉 耘虛) 스님은 상좌 월운 스님이 일컫듯이 ‘나라를 위해선 애국인, 후배를 위해선 교육인, 자신을 위해선 수행인, 고금을 통한 지식인으로 실로 우러르면 더욱 높고, 두드리면 더욱 깊으신 분’이었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조국이 일제에 의해 스러져감에 따라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신혼의 단꿈을 뿌리치고 홀로 이역만리 만주벌판에서 대동청년단, 서로군정서, 광한당 등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해 투쟁을 벌였다. 또 역사를 바라보는 긴 안목으로 후학양성에 크게 힘써 배달학교, 동창학교, 흥동학교, 보성학교, 광동학교 등을 설립운영하거나 직접 교사로서 교육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족회의 기관지인 『한족신보』의 사장 및 주필로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며 또 독립을 위해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기도 했다.


독립운동하며 출가

이런 스님이 불연(佛緣)을 맺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에 의해서였다. 1921년 30세가 되던 해 독립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왜경에 쫓겨 금강산에 들어갔고 이를 계기로 은사인 경송 스님과 노장 월초 스님과 인연을 맺어 출가한 것이다. 이후 불문에 귀의하고도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불교를 공부하고 스님들을 지도하는 일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독립투사로서의 영광보다는 혹독한 탄압도 받지만 스님은 본격적인 중생구제의 길로 들어섰다.


역경으로 불교대중화 견인

걸을 때를 제외하곤 손에서 책을 떼지 않으셨다는 스님은 이해 『능엄경』을 시작으로 『무량수경』『범망경』『정토삼부경』 등을 번역해 나갔다. 또 1961년에는 우리나라가 불교를 수용한 이후 처음으로 『불교사전』을 펴내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스님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칠순을 넘기면서 오히려 역경불사의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1964년 역경원장과 역경위원장의 책임을 동시에 맡아 20세기 최대의 불사라 일컬어지는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한글화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이들은 운허 스님이 있었기에 대불사가 착수되고 원만히 진행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다음 생에도 출가해 역경사업을 하겠다”는 스님의 기도와 원력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1년 9월 상좌 월운 스님에 의해 37년만에 대불사를 회향하게 된 것이다.

<사진설명>1973년 동국역경원 개강식에 참석한 운허 스님(가운데)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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