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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만공 스님 (1871∼1946)

기자명 권오영

근대 선종 골격 형성한 선지식

1946년 11월 13일 입적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선맥의 기운이 스러져가던 한국불교를 일으킨 사람이 경허 스님이라면 그의 제자 만공 스님은 스승의 선지를 계승해 선풍을 진작시키고 선종의 골격을 형성시킨 선지식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계율을 강조하고 선 수행을 진작시켜 한국불교 선종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일제에 맞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스님이기 때문이다.

1871년 전북 태안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만공 스님은 83년 김제 금산사에 있는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하면서 불법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스님은 이듬해 공주 동학사를 찾은 경허 스님을 만나면서 서산 천강사에서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게 된다. 이후 스님은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를 화두로 삼고 참선에 열중했다.


경허 스님에게 점검

그러던 중 1895년 아산 봉공사에서 새벽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게송을 읊다가 홀연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마곡사 토굴을 찾아 수행 정진하던 만공 스님은 어느 날 토굴을 찾은 스승 경허 스님으로부터 자신의 공부 내용을 점검 받게 된다. 이 자리서 스님은 스승으로부터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조주의 무자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다시 수행에 매진하게 된다. 깨달음에 대해 끊임없이 갈구했던 스님은 마침내 그의 나이 31세 되던 1901년 통도사 백운암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깨닫고, 스승으로부터 전법게를 받게 된다.


금오 스님 등 후학 양성

스님은 일제가 한국불교를 일본 불교화 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에 반기를 들고 1937년 미나미 총독이 주재하는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조선과 일본불교가 합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한국불교 선종의 맥을 잇는 가교역할을 담당했던 만공 스님은 보월, 고봉, 금오, 벽초, 원담 등 걸출한 후학을 양성한 채 1946년 11월 13일 덕숭산 전월사에서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사진설명>만공 스님이 주석했던 서산 간월암 전경.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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