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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 산들로 호국신장 삼았구나”-무주 안 국 사

기자명 김형섭
아침저녁으로 살얼음이 어는 겨울이다. 이 겨울 북쪽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을 등지고 무주 안국사로 떠난다. 산들로 켜켜이 둘러 쌓인 전북 무주땅. 무주 시내를 지나 영동방면을 향하다보면 적상산을 만나게 된다.

‘단풍이 붉게 물들면 마치 여인의 치마와 같다’하여 붙여진 적상산(赤裳山). 이미 단풍은 떨어져 개골(豈骨)한 적상산이지만 봉수대처럼 우뚝 솟은 봉우리에서 넘치는 기개가 위풍당당하고, 저 산 저 깊은 곳에서 뿜어내는 기품 또한 깊고 드넓다. 안국사 가는 길 산허리를 휘감은 안개마저도 물빛처럼 푸른빛을 띠고 있다. 때로는 산 그림자 속에 들고, 다시 그림자를 빠져 나오는 그 길은 이내 안국사로 이어진다.

무슨 사연을 담고 있기에 이 깊은 산중에 절이 들어선 것일까. 소나 말도 귀했던 그 시절 특별한 이동 수단도 없었을 진데…. 산이 깊어갈수록 의문도 깊어진다.

깊은 산너머에 있는 까닭일까. 안국사는 아직도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곱고 순박한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기슭을 올라 하늘에 이르면 만나는 일주문. 여산 권갑석(如山 權甲石)의 필체라는 ‘국중제일정토도량(國中第一淨土道場)’ 편액이 먼저 눈길을 끈다. 글씨도 글씨려니와 무학대사가 “나라 안 제일의 길지”라고 한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나라 안 최고의 길지(吉地)라”

단아하게 깍은 계단을 따라 오르니 극락전을 감싸 안은 듯한 청하루(淸霞樓)가 눈에 들어온다.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대웅전을 지켜선 모습이 위엄과 기품이 있다. 길을 따라 청하루에 오르니 구름 너머 구겹 덕유산 자락이 사찰 마당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인 형상, 마치 안국사를 중심으로 병풍을 두른 듯하다. 일주문에 걸린 편액이 그 제야 이해가 된다.

안국사 극락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인 맞배지붕 건물로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맞배지붕 건물 특유의 단아한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극락전 우측 뒷부분을 보니 일부분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 이상하다. 아직 단청작업이 진행중인 것일까.


백학이 남긴 ‘미완의 단청’

지나던 종무원에게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답한다.

“옛날 스님께서 극락전을 중창하시고 단청을 하려 했으나 불사금이 부족해 이를 마무리하지를 못했다 합니다. 걱정의 나날을 보내던 스님이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백일 기도를 지성으로 드리면 단청이 절로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백일 동안 물 한 그릇을 넣어주되, 절대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사라졌다 합니다. 그로부터 지성으로 기도를 시작한 스님은 99일 되던 날.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문틈으로 살짝 엿보게 되었는데. 이때 꿈에서 만난 노인은 온데 간데 없고 붓을 입에 문 하얀 학이 단청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순간 스님이 지켜보는 것을 눈치 챈 학은 이내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극락전 한쪽에는 딱 하루만큼 단청할 분량의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학이 단청을 해서일까. 극락전 단청엔 학 그림이 많다.

사면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첩첩산중에 위치한 안국사는 분명 신비로운 절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극락전 좌측에 있는 천불전의 유래를 알면 왜 이 깊고 깊은 산중에 안국사가 자리잡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현재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천 분의 부처님을 모신 전각은 단순한 전각이 아니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을 겪으며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해 전국의 사고가 불에 타고 만다. 조선 조정은 춘추관 외에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하게 이른다. 그러나 당시 북방이 위험하여 광해군 6년(1614) 천혜의 요새로 이름난 무주 적상산에 실록전을 세우고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보관하게 된다. 그 후 일본에 의해 사고가 폐지 될 때까지 300여 년간 국가의 귀중한 국사를 보존했던 실록전이 바로 지금의 천불전인 것이다. 현재 천불전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 88호로 지정돼 있다.


전란 중 실록 보호한 천불전

그러나 선원록이 보관됐던 천불전은 1995년 무주 양수 발전소가 완공되면서 수몰돼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고이 간직할 수 있었던 사고지가 물질문명에 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전란의 화마를 입지 않은 유일한 사고지인 천불전 아니 실록전. 지금은 그 쓰임이 달리 쓰여지지만 전란을 피해 첩첩산중으로 들어온 옛 선조의 피와 땀이 오롯이 담겨 전해지는 듯하다.

경내를 거닐어본다. 산허리를 타고 넘어온 솜뭉치 같은 안개가 코끝을 스친다. 마음이 상쾌하다.

<사진설명>청하루에서 바라 본 극락전.

처마 서리서리 피땀 맷힌 듯

고려 때 지방관인 안렴사(按廉使)들이 난을 피해 올랐다는 안렴대에 오르며 안국사를 돌아보니 극락전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영조 4년 조성됐으며 높이만도 10m가 넘는 괘불탱화(보물 1267호)가 남아 있고, 일부 남아 있는 괘불대의 크기 또한 상당한 것으로 미뤄보면 그리 큰 것만도 아니다. 그 옛날 안국사를 찾던 신심 가득한 불자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늠할 수 있다.

안렴대에 이르니 이곳 또한 사고를 지키기 위해 힘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정묘호란 당시 불길 속에 유실될 위험에 처한 사고의 장서들을 이곳 바위굴 속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이 나라의 역사와 정신을 지켜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발휘한 선조들의 뜻이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손을 뻗으면 향적봉이 닿을 듯 가까이 있다. 청하루에서 본 전경과 또 다른 맛이다. 물빛을 띤 산안개가 넉넉히 풀어헤친 모습이 지평선을 바라보는 듯하고, 드문드문 솟은 봉우리는 지평선을 건너는 이들이 잠시 쉬어갈 섬인 듯하다.


무주=김형섭 기자 hsk@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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