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구꽃

노란 개나리꽃 같은 봄 햇살이 수줍은 살구꽃처럼 흩어진다. 나른하기는 하지만 못 견딜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다. 따뜻한 봄날의 오후다. 어딜 가도 꽃이니까 아무 데서나 봄이다. 속속들이 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봄을 노래하는 꽃들 가운데서도 벚꽃과 살구꽃을 좋아한다. 벚꽃은 다른 사람도 좋아하지만, 살구꽃은 나만 좋아한다는 비유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벚꽃은 화려해서 좋고, 살구꽃은 예뻐서 좋다는 말로도 표현하고 싶다. 봄은 벚꽃과 살구꽃을 보유한 계절의 여왕이다. 

신촌 금화터널 부근을 지나다 주택 담장 위로 살구꽃 가지 하나가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봤다. 대도시에 몇 그루 남아 있지 않은 고목(古木) 살구나무라는 생각이 들자 콧등이 시큰해졌다. 당당하던 나무도 시간의 무게 앞에서는 저렇게 무력해질 수밖에 없구나라는 안타까운 마음에 감정이 울컥해졌던가 보다. 꽃망울이 벙글어졌을 때 벚꽃과 살구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시골 출신 서울사람이다. 도회지에서 자란 사람들은 화려한 벚꽃을 좋아할 뿐 새침데기 살구꽃의 속마음은 잘 모른다. 살구꽃은 벚꽃보다 열흘쯤 일찍 핀다. 자세히 살펴보면 꽃의 색깔도 약간 다르다. 붉은빛이 감도는 분홍색과 분홍빛이 섞여 있는 하얀색의 차이다. 살구나무가 벚나무보다 표면이 시커멓고 우둘투둘한 것도 두 나무를 감별하는 방법이다. 의인화(擬人化)의 눈으로 꽃을 보면 재밌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던 아기 살구꽃이 꽃샘바람이 불자 얼른 꽃망울을 거둬들인다. 엄마를 따라 나들이에 나섰던 아이가 추우니까 빨리 집에 가자고 조르는 모습과 흡사하다. 살구꽃은 다른 봄꽃들보다 유독 추위를 탄다. 꽃의 개화 시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벚꽃과 살구꽃은 닮은 듯 다른 꽃이다. 벚꽃은 환하게 웃지만, 살구꽃은 말없이 미소 짓는다. 기껏해야 볼이 발그스레해지는 정도다. 벚꽃이 도시 아가씨의 이미지라면 살구꽃은 고향 동창생의 이미지다. 벚꽃은 흐드러지게 필 수 있으나 살구꽃은 흐드러지게 피는 법이 없다. 꽃의 분위기나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살구꽃은 이른 봄에 피었다가 벚꽃이 본격적으로 피기 직전에 꽃잎을 접는다. 벚꽃 네가 더 예쁘니까 나는 그만 자리를 비켜 주겠다는 것일까. 벚꽃만큼 눈에 띄지 않는 살구꽃이 애처롭게 보인 적도 많았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살구꽃과 읍내의 학교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던 벚꽃에 대한 추억의 농도(濃度)는 다를 수밖에 없다. 꽃이 지고 잎이 난 뒤에도 두 나무는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꽃 색깔과 잎 모양이 유사해 멀리서 보면 언제나 같은 나무였다. 나에게 살구꽃은 고향의 추억이자 나이 듦을 확인시켜주는 서러운 봄꽃이다. 고향은 그리운 곳이 아니라 아픈 곳이다.

학교 우체국 앞에 살구나무 세 그루가 고졸(古拙)하게 서 있다. 옆에는 여러 그루의 벚꽃나무들이 덩치가 작고 볼품없는 살구나무를 향해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들의 위세에 눌려 살구나무는 기가 한풀 꺾인 모습이다. 그래도 살구나무는 올해도 변함없이 소담스럽게 담은 살구꽃 두 바구니를 선물해 주었다. 

살구꽃이 피어 있을 때는 틈날 때마다 살구나무 앞 나무 벤치를 찾는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고독한 즐거움과 익숙한 한가로움을 쾌락한다. 앉은 자리에서 정각원 범종을 내려다보며 산란한 마음을 위로받은 적도 많다. 정각원 지붕의 기와 곡선이 부처님 오신 달의 연등 행렬을 닮았다. 비스듬하게 누워 보이는 돌계단 위로는 오색연등이 염화미소(拈華微笑)의 법문을 준비하고 있다. 마치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신심 깊은 보살들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

꽃이 지고 잎이 무성하기 전의 늙은 살구나무를 바라본다. 벚꽃엔딩에 앞서 꽃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삭발염의(削髮染衣)라도 한 것일까. 머지않아 살구꽃은 살구의 옷을 입고 우리 곁에 다시 환생(還生)할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열매는 봄날의 꽃을 기억이나 할까.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81호 / 2021년 4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