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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한 없이 낮출 때 남의 마음이 움직이고 세상도 바뀐다”

  • 무진등
  • 입력 2021.04.16 16:58
  • 수정 2021.04.16 17:44
  • 호수 1582
  • 댓글 1

절하는 노동운동가 박문진 조계종 사회노동위원

병원 간호사 부당한 처우에 맞서 시작한 노동운동의 대가는 해고
좌절에 빠져 찾은 지족암서 일타 스님에게 “절 해야” 가르침 받아
75m 고공농성 현장서 절·명상으로 227일…14년 만에 복직 이뤄

박문진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위원.
박문진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위원.

거센 바람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지상 75m.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의 텐트 한켠에는 자그마한 미륵반가사유상이 모셔져 있다. 춥고 외로운 농성현장에서 그를 지탱해준 건 부처님이었다. 농성 107일째, 동료 간호사가 건강상의 문제로 먼저 내려가 홀로 남은 천막에서 그는 어김없이 500배 기도와 명상에 매진했다. 불쑥불쑥 밀려드는 번뇌 속에서 스스로를 비워낸 지 227일이 되던 날 해고노동자 박문진씨는 복직과 노조활동 자유가 명시된 합의서를 들고 당당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2020년 2월12일은 해고 14년 만에 가장 평화적이고 불교적인 방법으로 복직을 이뤄낸 날이다.

올해 61세,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재가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 씨의 어린 시절 꿈은 나이팅게일이었다. 많은 아프리카 여성들이 열악한 출산환경에 목숨을 잃는다는 소식에 안정적인 의료의 절실함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간호사 및 조산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임상경험을 쌓기 위해 27살이 되던 1988년 영남대의료원 산부인과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가기 전 길어야 2년 정도 다닐 직장이었다.

분만실에서 일하며 출산 과정을 돕고 일에 대한 열정도 키워갔다. 그러나 병원 생활은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았다. 인력부족과 3교대근무로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환자를 돌봐야할 만큼 업무강도는 높았다. 빈번한 ‘태움(간호사들 간의 괴롭힘)’으로 마음도 지쳐갔다. 그래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기에 참고 버텼다. 배움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 눈앞에 드러나는 병원의 부조리한 실상은 나날이 커져갔다. 동료들의 어려움을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박문진 위원은 해고자 복직을 발원하며 박근혜 후보 자택에서 57일간 삼천배를 진행했다.
박문진 위원은 해고자 복직을 발원하며 박근혜 후보 자택에서 57일간 삼천배를 진행했다.

해외 의료봉사 계획은 잠시 접어두고 병원 노동자와 환자들의 권익을 위해 1990년 영남대학병원 노조위원장이 됐다. 약자들을 위한 일에 우선순위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1995년에는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 위원장과 민주노총 첫 여성 부위원장까지 맡아 의료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불합리한 처우를 바꾸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당시 간호사한테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당연시 여겨졌고 호칭은 무조건 미쓰 박, 미쓰 김이었어요. 간호사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은 물론 과잉진료 등 환자들을 향한 부당한 처우도 심각했죠. 이러한 문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노동 현장에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한 대가는 해고였다. 분노가 차올랐다. 동시에 끝이 보이지 않는 저항과 노동운동의 현실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일타 스님의 건강을 돌보던 선배 간호사가 해인사 지족암에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쉬다오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 나섰다. 지족암은 은근한 경계심마저 절로 풀어줄 만큼 포근했다. 특히 처음 듣는 예불소리에 눈물이 핑 돌았다. 사찰 경내 가득한 예불소리는 치열한 노동현장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좌절의 시간을 위로받는 듯 했다. 잊지 못할 불교와의 첫 만남은 가랑비에 옷 젖는 듯 시작됐다.

노동운동에 지칠 때면 자연스럽게 걸음이 지족암을 향했고, 일타 스님도 그런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스님은 소박하지만 정갈한 음식을 내어주고, 쉴 공간도 마련해줬다.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게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줬다. 불교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해인사 저녁예불에 참석했고 참선·경전읽기·절수행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절은 비우는 행위야. 항아리에 담긴 쓰레기를 비우는 것과 같이 그 속을 채운 온갖 욕심을 비운다는 생각으로 절을 해봐”라는 일타 스님의 가르침은 30여년간 그가 노동운동의 현장을 지킬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

“노동운동을 하면 남에 대한 원망과 분노심이 커지는 순간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불교를 버팀목 삼아 모진 세월을 견뎠어요.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성찰하며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죠. 더욱이 약자들을 위한 활동에 어쭙잖은 타협은 절대 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과보는 결국 다 돌아오니까요.”

박문진 위원은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벌인지 227일만에 복직과 노조활동 자유를 이뤄냈다.
박문진 위원은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벌인지 227일만에 복직과 노조활동 자유를 이뤄냈다.

2000년 초 출근투쟁과 단식으로 어렵게 복직할 수 있었지만 2007년 4일간의 부분파업으로 또다시 ‘해고노동자’ 신세가 됐다. 이날 이후 병원 측의 노조탄압은 더 은밀하고 가혹해졌다. 노조가입 여부로 승진이 결정됐고 조합원들에게는 은연중에 불이익이 가해졌다. 그 결과 1000여명에 달하던 보건의료노조 영남대의료원지부 조합원은 고작 7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2012년 영남대학병원의 실질적 주인으로 알려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서울 삼성동 집 앞에 섰다. 삼천배를 시작했다. 해고자 복직과 노조 정상화를 발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삼천배는 한겨울 추위도 막지 못했다. 그렇게 꼬박 57일이 지났다. 끝내 변화는 없었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날 짙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삼천배를 통해 오롯이 자신을 비워낸 자리엔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의미들이 찾아들었다.

“처음 절을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동료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으로 반지하 방을 구해 매일 박 후보의 자택을 찾아갔죠. 삼천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추운 날씨에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하다 보니 저를 응원해주는 많은 분들이 있단 걸 알게 됐죠. 특히 지나가던 어린 학생들이 ‘복직 꼭 성공하세요. 힘내세요’라며 자신의 간식을 내어주던 날은 하루 종일 힘든 줄도 몰랐어요. 끝내 복직은 이뤄내지 못했지만, 절은 저에게 과격하고 극단적이라 말하는 노동운동에서 발견한 가장 평화적이며 불교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었어요. 스스로를 한 없이 낮춰 자신을 성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확신도 생겼어요.”

일상으로 돌아간 그는 노동현장에서 한걸음 떨어져 자신의 삶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2016년 캄보디아 오지 마을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가톨릭 교단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며 1년 가까이 봉사했다. 더운 날씨와 의사소통의 문제로 힘들었지만 보살행이라 여기며 스스로 단단해지는 계기가 됐다.

오랜 도반이자 동지인 김진숙 노동자의 복직을 위해 청와대 앞에서 다시 한달여 동안 1000배 정진했다.
오랜 도반이자 동지인 김진숙 노동자의 복직을 위해 청와대 앞에서 다시 한달여 동안 1000배 정진했다.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후인 2019년 7월1일 새벽 5시, 같이 해고됐던 송영숙 간호사와 짙은 안개를 뚫고 영남대의료원 옥상에 올랐다. 병원 측과 기나긴 갈등에도 ‘나는 지치지 않았고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해야 했다. 해고자 신분으로 옥상에 올랐던 그는 227일 만에 영남대의료원 간호사의 신분을 되찾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몸을 추스르자마자 다시 거리로 나섰다. 오랜 도반이자 동지인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를 위해서다. 김진숙 노동자의 복직에 한 줌 힘이라도 보태고자 오체투지는 물론 청와대 앞에서 한달여 동안 빠짐없이 1000배 정진했다.

약자를 위한 그의 열정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한 치 오차 없이 과보는 돌려 받는다’는 부처님 말씀을 항상 새기며 자신을 낮춰 약자들을 보듬는 화쟁과 화합의 걸음을 내딛는다. “코로나19가 끝나면 해외봉사 가서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며 미소 짓는 그는 이미 약하고 설움 받는 이들의 관세음보살이다.

김내영 기자 ny27@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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