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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바람과 세속적 가치

꽃샘 추위처럼 정치 바람은 지나갔다. 어느 때보다 폭풍우와 거친 회오리를 동반했다. 이제 지나간 흔적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 폭풍이 지날 때마다 씁쓸한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불교적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거나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교행사의 앞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다. 더구나 그런 일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스님과 신도들의 모습을 보면 한국불교의 현실과 잠재된 DNA를 연상하게 된다. 새삼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신념과 세속적 가치의 만남과 어울림이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특히 신도를 팔아 상응하는 향대(香貸)를 바라는 스님들이 있는 한, 불교행사장의 앞 자리에 특정 정치인이 자리 잡고 지지를 호소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불교행사에 오지 않을까 걱정을 하거나 아예 특정 정파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스님들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불교적 신념이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일인지 알 수는 없다. 동북아 불교사의 굴곡진 얼굴의 하나가 오랫동안 정치에 예속되어 왔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신념에 의거하지 않고 세속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불교의 자주성을 침해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몇 년 전이다. 중국 신강성에 있는 투르판의 고성을 방문한 적이 있다. 토성의 흔적만이 남아 있는 이곳은 당나라 현장 스님과 인연이 있다. 현장 스님이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몇 년 머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 왕궁의 과년한 공주가 스님에게 반해 결혼을 원했다고 한다. 임금과 주변 사람들은 공주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현장 스님을 설득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세속적 부귀와 영화에 흔들리지 않자, 당시 임금은 스님을 3년여 억류했다. 인도로 가는 일정이 지체되자 현장 스님은 불심이 깊었던 공주의 어머니를 설득해 인도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부귀공명도 스님의 앞길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출가자의 위대함은 세속적 가치를 충족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고 있다.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이름 없는 전도승들의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동북아의 불교사가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 낮에는 뜨거워 걸을 수 없는 땅, 그 길고 험난한 땅을 여행하면서도 전법을 통해 중생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 길을 통해 성공한 전법승은 십 중 한둘에 불과했다고 하며, 앞선 여행에서 죽어간 전법승들의 해골이나 유골들은 뒤에 오는 전법승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내내 어느 바위 밑에서 혹은 황무지 내지 고적한 사막 위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전도승 내지 구법승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신념이 얼마나 굳건하기에 이 끝도 없이 펼쳐진 황막한 길도 마다하지 않았을까? 그런 정신을 잊지 않고 이 시대에 재현할 수 있다면, 한국불교의 앞날이 지금보다는 희망적이지 않을까 하는, 망상 아닌 망상이 나를 사로잡았었다. 한국불교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구법승이나 전도승들이 지녔을 굳건한 불교적 신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흔들리지 않는 불교적 신념이 동북아시아에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서 불교는 200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새 문화 창출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적 신념이나 가치를 외면한 채, 교단을 이용해 개인적 욕망을 충족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불교의 앞날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 바람이 지날 때마다 교단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씁쓸함이다. 그렇지만 불교적 신념과 가치가 세속적 가치에 의해 흔들리거나 변질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하다.

차차석 동방문화대학원대 교수 svhaha@hanmail.net

[1582호 / 2021년 4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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