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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민중화가 오윤 : 소비 권하는 현세지옥을 그리다

기자명 주수완

소비의 유혹에 넘어간 내 자신이 만든 지옥

시왕도 형벌 장면 차용해 인간사회 번뇌와 고 시작됨 경고  
중독성 소비 표현함으로써 부정적 증상 적나라하게 드러내 
소비사회 비판하지만 사실상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어

오윤, ‘마케팅1: 지옥도’, 1980년, 131×162㎝.
오윤, ‘마케팅1: 지옥도’, 1980년, 131×162㎝.
통도사 시왕도 중 오관대왕도의 화탕지옥 장면, 조선후기.
통도사 시왕도 중 오관대왕도의 화탕지옥 장면, 조선후기.

오윤(吳潤, 1946~1986)은 민중미술, 판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조각가이다. 그가 추구한 민중미술이란 무엇일까? 여기서는 필자 마음대로 불교적인 해석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민중의 중(衆)은 ‘무리’, ‘많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도에서 불교교단을 지칭하는 상가(saṃgha)를 발음으로 번역해 승가(僧伽)가 됐고, ‘중’이란 뜻으로 번역했다. 현재 불자들은 스님들을 ‘스님’, ‘승’으로 부르고 ‘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스님들을 무시할 때 ‘중’이라고 표현하지만, 원래 ‘중’에는 전혀 비하의 뜻이 없었다.

여하간 ‘중’이 출가해서 모여서 수행하는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대중(大衆)’은 사부대중, 즉 스님과 함께 재가자, 신도까지 모두 합해서 부르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에서는 민중이란 말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불교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중’은 출가자, ‘대중’은 출가자와 재가자를 뜻하는 반면 ‘민중’은 재가자 집단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출가와 재가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일까? 종교적으로 구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출가자는 일절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소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에 반해 재가자는 재산을 지니고 있어 소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재산의 유무는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는 전통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에 결국 사회에서 소비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가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던 셈이다. 소비가 그렇게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오윤, ‘마케팅1: 지옥도’, 1980년, 162×132㎝. 

그래서 우리는 오윤의 그림 ‘마케팅1: 지옥도’에 주목하게 된다. 결국 이 그림에서 이야기하는 바처럼 소비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은 곧 지옥에 있는 것이고, 그러한 소비에서 벗어나는 것이 출가인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비는 단순히 무엇을 소모하는 개념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소비’란 밥을 먹는 것도 소비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대적 의미로는 살기 위해 식사를 하는 행위를 소비라고 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목적을 넘어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행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위상이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행위가 곧 소비이다. 

많은 기업들은 사람들의 소비로 운영된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의 지갑을 열고 소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 필요는 소비자의 필요가 아니라 기업의 필요다. 소비자는 처음에는 그런 소비를 부추기는 상술에 넘어가지 않을 것 같고, 기업이 제시하는 필요성을 크게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광고를 자꾸 보고,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거나, 혹은 주변의 얼리어답터들이 소비하는 것을 보면서 점차 없던 필요가 생겨나고 이어 자신도 그것을 소비하게 된다. 그런 소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버티는 현명한 소비자도 있다. 예를 들어 아직도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거나, SNS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소비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로부터 민폐 취급을 당할 수 있다. 때문에 민폐취급을 받아도 결국을 찾을 수밖에 없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휴대전화 없이도 살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일감을 하나라도 더 받으려면, 심지어 공공자전거를 빌려 타기 위해서라도 휴대전화를 가질 수밖에 없다. 소비를 권하는 사회, 그래야 경제가 돌아간다.

오윤의 ‘마케팅1: 지옥도’는 결국은 그렇게 유혹에 넘어간 소비자들이 소비를 위해 돈을 모으고, 돈에 집착하고, 자신의 정신과 내면이 아닌 소비를 통해 자신을 정의 내리려고 하면서 인간사회에서의 번뇌와 고가 시작되고 있음을 경고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불화에서 지옥장면을 그린 시왕도의 형벌 장면들을 차용했다. 그러나 조선불화 속의 시왕도가 우리 바깥에 있는 지옥세계를 묘사한 것이라면, 오윤의 작품 속 지옥은 다름 아닌 바로 내 자신이 만든 지옥임을 깨닫게 한다.

다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소비를 상징하는 브랜드라는 것이 기껏해야 코카콜라, 맥심, 아이스크림 등이다. 그렇지만 값싼 소비라고 해서 무시할 수 없다. 대부분 카페인 중독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중독성 소비를 표현함으로써 소비의 부정적 증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오윤 작가가 지금 생존해 있다면-안타깝게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 원숙한 작품을 쏟아낼 시기일 것이다- 콜라, 맥심이 아니라 이태리 명품 브랜드나 독일 자동차 앰블럼이 그려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런 브랜드를 소비하지 않는 더 많은 민중들은 소비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처럼 위안이 됐을 수도 있었겠지만, 오윤 작가는 작지만 큰 소비의 유혹에서는 사실상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이런 소재를 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시대에 소비는 미덕이다.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 만약 아무도 소비를 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굶을 것이다. 그래서 소비사회를 비판하는 작가 오윤 자신도 그림 소비를 권장한다는 의미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 속에 지옥의 벌을 받고 있는 자신을 그려 넣었으니 철저히 일관된 작가정신을 읽을 수 있다. 그 옆에는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있는 윤범모 선생으로부터 당대의 비평가, 동료 예술인이 나란히 앉아 벌 받고 있다. 또 지옥에서 자신의 죄를 비춰보는 업경대에 화가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다. 이는 예술가 자신도 소비를 권하고 있다는 뜻이다.  환경오염도 시키지 않는 예술작품 소비는 건전한 것일 수 있겠지만, 콜라나 맥심보다도 인기를 끌지 못해 쩔쩔매는 그 힘없는 예술계에 대한 자아비판일 수도 있겠다.

그러면서도 동료 예술인들까지 해학적으로 끌어들여 지옥에서도 웃음을 보여주는 것은 소재만 불교에서 따온 것이 아닌 진정으로 불교적 사유인 까닭이다. 알고 보면 이런 속고 속이는 소비권장사회가 지옥이기 때문에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스운 코미디이기 때문에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아닐까.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82호 / 2021년 4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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