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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아니라 행동

기자명 민순의

퀘이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낯선 이에게 건네받은 노트북의 화면에서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과거의 자신이라는 자가 ‘미래의 나에게’라며 현재의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네가 아는 너는 네가 아니라고. 나인 너는 독재자의 하수인이었으나 이제 잘못을 깨닫고 반군이 되었으니 독재자를 처치하는 것이 나이자 너의 임무라고. 존재하지 않는 기억으로 갖은 난관을 뚫고 만난 반군의 두목은 그에게 말했다.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서 괴로운가? 하지만 그대를 규정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이다.”

영화 ‘토탈 리콜’(1990)의 장면이다. 독재자의 하수인이었다가 반군이 된 척하는 퀘이드는 사실 반군의 두목을 찾기 위해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한 채 반군에 잠입하려 했던 진짜 하수인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쳐 놓은 덫에 걸려 정체성을 잃고 헤매던 퀘이드는 반군 두목의 말을 듣고 진정한 반군이 되기로 결심한다.

“기억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저 한 마디에 큰 충격을 받았던 스무 살의 젊은이는 이제 부처님 법을 공부하며 업(業)과 아상(我相)의 의미를 곱씹는다.

행위한 바 그 자체인 업은 진실로 엄중한 것이어서 그 과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업의 흔적은 시간의 흐름 속에 아로새겨져 현재의 구성물로 세상 곳곳에 자리한다. 

과보는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도리가 없다. 악업을 인정하고 참회하며 필요한 경우 응당한 책임을 질 것. 그러고 나서 새롭게 선업을 쌓는 수밖에. 새로운 업이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악인과 선인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구분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아상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아상 자체가 고정된 이미지에 대한 집착의 다른 이름이다.

아상은 기억을 토대로 한다. 하지만 기억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향수 다시 말해 관념의 덩어리일 뿐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한 한갓 관념에 의해 우리는 아상이니 집착이니 하는 것들을 갖게 되는 셈이다. 이쯤 되면 분별만이 아니라 기억까지 부끄러워진다. 굳이 악인과 선인을 구분해야겠다면 과거에 대한 허망한 기억 말고 현재의 행위 하나하나를 가지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많이 시끄럽다. 무엇보다 작금의 한국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편 가르기의 전선이 그어져 있다. 그 전선은 용케도 피아를 구분하여 여성과 남성을 가르고 청년과 장년을 가르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가르고 보수와 진보를 가른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이들은 저마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 말한다.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된 시시비비의 상이 많은 이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고 있다.

생각해 보자. 나에게는 관성에 의한 판단이 없었는가.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을 가지고 그는 본래 그렇다고, 그러니까 지금 그의 어떠한 행동도 보려 하지 않은 채 예전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라고 속단하지는 않는가. 나는 또 관성에 의해 행동하지는 않는가. 내가 행해온 것들의 궤적과 결과를 살피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이 사람이 본래의 나라며 성찰 없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도시 두 곳에서 새로운 시장님들이 선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검증을 이유로 숱한 기억들이 소환되었다. 요새 뜨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정말로 “기억 앞에 겸손해야 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에 기대어 지금 행해지는 그의 행동들을 덮어놓고 재단하지 않도록, 동시에 나 역시 나라고 알고 있는 어떤 모습만 믿으며 반성 없는 판단과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겸손하고 또 겸손할 일이다.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의존한 선입견을 거두고, 향후 이루어질 두 분의 행보에 나는 기대를 걸어보겠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장 nirvana1010@hanmail.net

 

[1583호 / 2021년 4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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