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 들은 바 없다

기자명 이제열

‘상’ 없으면 설하고 들을 법도 없어

‘석문의범’의 관음청 내용 탁월
관음보살·남순동자 내용 화엄적
중생·부처 차별 존재하지 않아
법을 설하고 듣는 주체도 없어

현재 한국불교에서 행해지는 의례의식은 거의 ‘석문의범’에 기반한다. ‘석문의범’은 근대 고승 안진호(1880~1965) 스님이 편찬한 불교의식집이다. 여기에는 예불문을 비롯해 각종 불공이나 천도재, 설법, 강연 등 전통적으로 행해지는 의식뿐 아니라 대중포교에 적합한 의식들도 다양하게 수록돼 있다. 조선후기까지 통일된 의식집이 없어 사찰마다 제각각이었던 불교의식이 이 책으로 인해 거의 동일하게 행해지게 된 것이다.

‘석문의범’을 자세히 살펴보면 형식도 잘 짜였지만 내용도 매우 훌륭하다. 반야, 법화, 화엄, 유식 등은 물론 선의 도리와 밀교 가르침까지 사상들을 폭넓게 내포하고 있고, 실천과 수행 원리까지 기술돼 있어 보는 이의 신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삼보통청을 비롯한 각 단에 올리는 예불문이나 불공의식문을 보면 예배와 공양 대상들을 어쩌면 이리도 잘 그려내고 있는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서도 관음청은 잘 그린 한편의 회화처럼 감동적이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관음도가 이 관음청을 떠올려 그린 데에도 이 같은 이유가 클 것이다.

한자로 된 청사(請詞, 청하는 말씀)의 내용을 음미해 보자.

“바닷가 외딴곳 보타낙가산, 도량의 교주이신 관세음보살께서는 삼십이응신과 십사무외력, 걸림 없는 네 가지 부사의한 덕과 팔만사천 법륜의 손과 팔만사천 인계의 팔, 팔만사천 청정한 눈으로 자비와 위덕을 고루 갖추셨습니다. 형상과 몸을 나투어 보이사 중생의 원에 따라 고통 없애고 즐거움을 베푸십니다. 대자대비의 관세음보살 대성자이시여, 바라옵건데 자비를 베푸사 이 도량에 왕림하시어 저희들의 공양에 감응하소서! 시로써 찬양합니다.
백의의 관음보살 설함 없이 설하니
남순의 어린동자 들음 없이 듣도다.
꽃병 위의 버들은 항상 여름 인데
바위 앞의 대나무는 온 세상이 봄이라하네.”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보타낙가산은 어디일까? 번뇌의 파도가 일렁이는 중생의 마음 바다로부터 벗어난 곳이다. 보타낙가산은 깨달음의 경지 즉, 부처의 경지를 상징한다. 도량은 청정처라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그 위상이 부처님이다. 비록 보살의 호칭을 띠고 있으나 부처님과 동일하다. 관세음보살은 바로 그 경지에서 십사무외력과 사부사의덕과 팔만사천의 손과 눈으로써 중생들을 제도한다.

위 문장의 사상적 배경은 ‘화엄경’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남순동자가 등장하는 것은 ‘화엄경’에 근거한다. 남순동자는 누구인가? 남쪽을 향해 구법의 길을 걸은 선재동자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주인공이 선재동자인 것이다. 관음청은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구법여행을 하던 중 28번째로 만난 관세음보살을 묘사한 내용이다. 선재동자는 관세음보살로부터 대비(大悲)의 문으로 수행을 삼으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런데 관세음보살과 남순동자의 대화방법이 매우 특이하다. 백의를 걸친 관세음보살이 설한바 없이 설하니 남순동자가 들음 없이 듣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화엄사상의 묘리가 들어있다. 화엄의 이치에서는 중생과 부처라는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을 설하는 주체도 없고 법을 듣는 객체도 없다. 관세음보살은 자신이 상대에게 법을 설한다는 상을 일으키지 않으며, 남순동자도 내가 당신으로부터 법을 듣는다는 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이리하여 설하고 들은 법도 마침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하는 자와 듣는 자 그리고 법들이 모두 공하여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법을 얻을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설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화엄경’이다. 이미 관세음보살과 남순동자가 법을 설하고 듣지 않아도 화병에 꽂아 놓은 버드나무 가지와 바위 앞의 대나무가 말없이 진리를 드러내고 있으니 무엇을 설하고 무엇을 듣겠느냐는 것이다. 남순동자는 관세음의 설법을 듣기 이전부터 이러한 이치를 알고 있었다. 다만 중생을 위해 이러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이제열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583호 / 2021년 4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