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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참회 그리고 사면

기자명 성진 스님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을 용서하냐고요!”
이것은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유괴 살해한 범인을 자신이 믿는 종교적 신앙심으로 용서해 주려고 찾아갔다가 오히려 범인의 예상 밖의 말에 여주인공이 절규하는 대사이다. 이 장면에서 범인은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서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하루하루를 감사히 여기며 살고 있다고 마치 성자처럼 말한다. 용서라는 단어를 이 영화에서만큼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방송에서 어느 청취자가 신부님과 목사님 그리고 스님인 나에게 이 영화를 예로 들면서 용서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 다르게 불교에서는 어느 대상에 대한 잘못을 불보살님이나 스님에게 대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없다. 다시 말해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는 식의 용서 형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라는 표현에는 거의 대부분 참회라는 단어가 함께 한다. 참회(懺悔)는 ‘뉘우칠 참(懺)’자와 ‘뉘우칠 회(悔)자’를 쓰는데 육조혜능 스님께서는 앞의 참(懺)자는 과거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고, 뒤의 회(悔)는 미래형으로,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서원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불교에서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상대에게 진심어린 참회를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정치인이나 유명인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피해자에게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대상 즉, 힘과 권력이 있는 대상이나 자신을 옹호하는 집단을 향해서 ‘유감’이라는 형식적인 언어로 표하는 것을 자주 본다.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대상조차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주어나 목적어가 빠진 용서 구하기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회나 회개라고 볼 수 없다. 반면 진정한 참회를 함에도 그것을 용서해 주지 않는 것 또한 불교에서는 큰 허물이라 이야기한다. 

‘잡아함경’ 제40권 ‘득안경(得眼經)’에서 두 비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한 비구는 크게 소리 내어 꾸짖고 있었고 한 비구는 잠자코 있었다. 그 꾸짖던 비구는 잠시 후 자신의 잘못을 알고 크게 참회하고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상대 비구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용서해 주지도 않았다. 결국 다른 대중들까지 함께 가세하면서 큰 소란이 일어났고 결국 부처님까지 아시게 됐다. 이때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잘못하고도 뉘우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그 둘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잘못을 하고 그것을 뉘우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잘못을 비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더 훌륭한 일이다. 이들은 모두 현명한 사람이다.” 우리 모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만약 참회와 용서가 없다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끔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려울 때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용서받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면 한결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요즘 사면(赦免)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론에 거론되고 있다.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전직 대통령들을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회적 용서인 사면이라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사회적 용서의 주체는 국민이여야 하고, 이것을 통해 국민의 정서가 아픔을 딛고 화합의 장으로 갈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면은 그 대상자가 아니라 아픔의 당사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원칙이다. 그래야 국민들을 ‘밀양’의 여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전 속의 이야기처럼 용서를 구하는 자나 받아 주는 자 모두 현명한 주인공이 될 것이다.

성진 스님 조계종 군종특별교구 사무총장 sjkr07@gmail.com

[1584호 / 2021년 5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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