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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 가는 길

아주 오래전 5월 중하순의 어느날 석굴암을 거쳐 토함산을 넘어 함월산 기림사까지 무작정 걸었던 적이 있다. 아침에는 해를 토해내는 토함산(吐含山)과 씨름하고 저녁에는 달을 품은 함월산(含月山)에서 쉬고 싶었던가 보다. 불국사역에서 출발한 산행은 불국사에서 석굴암에 이르는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오르다가 일찌감치 포기할 뻔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가쁜 숨소리는 내 귀에도 거슬렸다. 기림사는커녕 석굴암에서 일정을 포기하고 싶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겼다. 석굴암을 우회해서 통과했다. 토함산자락을 따라 오르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어느 한적한 길에서는 ‘동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간첩이 휴식을 취했던 곳’이라는 오싹한 팻말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런데 낡은 배낭을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내 모습이야말로 반공 포스터 속의 바로 그 수상한 사람이었다. 멋쩍게 웃고 말았다. 길은 끊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저 멀리서 동해 앞바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마도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있는, 꿈에도 잊지 못한다는 그 바다였을 것이다. 꽉 막혔던 가슴이 탁 트였다.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나는 현재 한수원본부가 있는 장항리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길은 지도가 가리키는 기림사 가는 길의 최단 코스였다. 장항분교 너머로 희뿌연 먼지가 날리는 도로가 보였다. 경주-감포 간 국도였다. 감포 방향으로 한 시간 정도를 더 걷자 골굴암과 기림사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적당한 크기의 화강암에 까만 페인트로 쓴 소박한 글씨였다. 여전히 두 시간 거리의 길이 남아 있었다. 아득했다. 해마저 뉘엿뉘엿 넘어갔다. 무념무상의 명품쾌락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계속 걷기로 했다. 더 늦기 전에 목적지인 기림사에 도착해야만 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만약의 상황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몸은 천근만근이고 다리는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었다. 새벽부터 토함산을 가로질러 함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예닐곱 시간이나 걸었으니 다리가 풀릴 만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멈추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림사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아카시아꽃 향기가 진동했다. 길은 더디고 멀었다. 9시가 다 돼서야 겨우 일주문 맞은편의 호암천(虎巖川)에 이르렀다. 법당 참배를 내일로 미루고 서둘러 숙영 준비를 했다. 그날 나는 이 절에서 저 절로 가는 나만의 ‘기림사 가는 길’을 걸었다. 어디 산티아고 가는 길만 순례길이던가. 나에겐 절에서 절로 이어지는 모든 길이 순례길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사찰들을 순례길로 연결하면 법향기(法香氣) 가득한 트레킹코스가 될 것이다. 어디서나 걷는다고 저절로 순례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 철학이 없는 길은 처음부터 순례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1700년 역사의 한국불교야말로 이런 순례길의 원조 지적 재산권자다. 이 절에서 저 절로 길이 열리다 보면 한 번 더 찾고 싶은 절도 생기지 않겠는가.

오색연등이 꽃불을 밝히고 있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비가 오는 늦은 봄밤의 연등은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빗물을 머금은 형형색색의 연등 불빛이 마치 강물에 흐르는 유등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부처님의 염화(拈花)와 가섭존자의 미소(微笑)를 동시에 친견하는 듯한 법열을 맛본다. 낮에는 한적하던 캠퍼스가 밤이 되면 두 손을 맞잡고 나온 젊은이들로 왁자지껄하다. 연등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장면을 추억에 담기 위해 나온 친구나 연인들이다. 불상 앞은 이미 기념사진의 명소가 된 듯하다.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스마트폰 셔터 누르는 소리가 기분 좋을 만큼 요란하다. 더러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가족들도 보인다.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오신날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86호 / 2021년 5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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