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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시신 보시

내 시신을 부디 들짐승과 새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시오

시신 훼손 극히 꺼려하는 동아시아에서는 파격적인 현상
삼론종 길장·삼계교 신행·일본 잇펜 스님 등도 시신 보시
조선 침굉 스님도 유언 남겼지만 제자들 고민 끝 ‘편법’

고승들의 일대기를 다룬 문헌에서는 스님들이 자신의 시신을 동물들에게 보시하겠다는 기록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사진은 일본 잇펜 스님(왼쪽)과 조선의 침굉 스님(오른쪽).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다고 피해가지 않는다. 죽음은 그래서 평등하다. 하지만 죽은 뒤에 그 시신이 어떻게 다뤄지냐는 지위와 권력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은 거대하면서도 은밀한 무덤을 만들어 자신들의 시신 훼손을 막고자 했다. 사후에 현세의 삶이 재현된다는 믿음으로 온갖 귀중품은 물론 시중들 사람들까지 함께 묻도록 했다.

반면 불교의 죽음은 극히 소박하다. ‘옷 세벌에 발우 하나(三衣一鉢)’면 충분하다는 출가자들은 죽어서도 별다른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일부 고승의 경우 화장한 뒤 나온 사리를 모신 승탑을 세웠지만 대부분은 한줌 뼛가루가 되어 산림이나 들판에 뿌려졌다. 심지어 자신의 시신을 짐승과 벌레들에게 보시하는 스님들까지 있었다. 인도나 티베트에서는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있겠으나 신체 훼손을 극히 꺼리는 동아시아에서는 엄청난 파격이다. 죽는 순간까지 뭇 생명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주려는 지극한 자비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승들 일대기를 다룬 문헌에는 이런 기록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시신을 짐승들에게 주도록 유언한 초창기 인물로 남북조시대의 지순 스님(智順, 447~507)을 꼽을 수 있다. ‘성실론’과 ‘열반경’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스님은 누구든 자비로 대했으며, 결코 물리치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밤에 도둑이 들어 스님의 물건을 훔친 일이 있었다. 때마침 절에서 일하던 사람이 쫓아가 도둑을 붙잡았다. 스님은 도둑을 자신의 방에 머무르게 하고, 이튿날 아침 돈과 절 안의 값비싼 물건까지 직접 챙겨 돌려보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미리엘 신부가 은촛대와 은접시를 훔친 장발장을 용서하기 1300여년 전에 이미 운문정사라는 중국의 사찰에서 노스님이 자신의 물건을 훔친 도둑을 용서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졌던 것이다.

지순 스님이 61세 되던 해였다. 병이 깊어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스님은 곡기를 끊고 물만 조금씩 마셨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제자가 몰래 묽은 쌀죽을 끓여 스님이 마시도록 했다. 그것을 받아 삼키던 스님은 음식이 들었음을 알고 모두 토해내고는 물을 찾아 말끔히 양치질을 했다. 제자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꾸짖은 스님은 자신의 시신을 땅에 묻지 말고 벌레와 새들이 먹게 하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차마 스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그러고는 절 옆에 시신을 묻고 비를 세워 스님의 공덕을 찬탄했다. 문헌에는 지순 스님이 입적하던 날 방안에서 기이한 향기가 났다고 전한다.

불교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종단으로 철저한 실천과 평등을 내세워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삼계교의 종조 신행 스님(信行, 540~594)도 자신의 시신을 새와 짐승들에게 보시한 고승이다. 병과 굶주림이 끊이질 않던 시대에 태어난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자비심이 깊었으며 17세에 산문에 들었다. 스님은 철저한 계행과 교학에 대한 깊은 이해로 크게 주목 받았지만 사찰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잇따른 전란으로 대지는 백성들의 피로 물들었고 관료들과 사찰들까지 민중의 고통을 외면했다. 오탁악세의 말법시대였다. 신행 스님은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가 부처라는 보불(報佛), 모든 이를 부처님처럼 대해야 한다는 보경(普敬), 자신의 허물을 받아들이고 두타행과 참회를 해야 한다는 인악(認惡)사상을 주창했다. 그는 존대 받는 승려가 아니라 시봉하며 사는 사미로 살겠다고 다짐하고는 비구계를 반납했다. 이후 절에서든 길거리에서든, 승려이든 일반인이든, 관료이든 날품팔이든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을 대하듯 절을 했다. 그들 모두 언젠가는 보살행을 펼쳐 성불하게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행 스님의 행동이 세간의 화제가 됐고 스님의 간명한 언어와 고결한 인품에 사람들은 감복했다. 그 앞에서는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를 넘어 누구나 평등했다. 스님과 뜻을 함께 하겠다는 이들이 속속 생겨났고 자연스레 새로운 교단인 삼계교가 형성됐다. 스님은 “아낌없이 베풀면 부처를 이룬다”며 빈민구제소인 무진장원을 세웠고, 누구라도 쌀과 돈을 빌려 갈 수 있도록 했다. 담보나 증서가 필요치 않았고, 1년 뒤건 10년 뒤건 능력이 될 때 갚으면 됐다. 백성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나눌 것이 있는 사람은 복을 짓기 위해, 없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무진장을 찾았다. 삼계교의 구제활동은 전국으로 알려졌고, 무진장원도 곳곳에 세워졌다.

신행 스님은 일생동안 금욕과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많은 저술을 집필하면서도 하루 6번의 예불과 참회, 걸식을 빠뜨리지 않았던 스님은 594년 1월9일 54세로 세상과의 연을 접었다. 중생의 고통을 슬퍼하며 항상 눈물 흘리고 다니는 상제보살의 현신이라는 신행 스님의 마지막 부탁이 자신의 시신을 숲속에 버려 새와 짐승들에게 먹이라는 유언이었다. 제자들은 이를 따랐고 그 뒤를 이어 교단을 이끈 승옹 스님도 스승이 그랬듯 자신의 시신을 동물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삼계교는 파격적인 사상과 나눔으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정권과 기존 교단에게는 늘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삼계교는 오랜 세월 탄압을 받으면서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했으나 10세기 무렵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중국 삼론학의 대가였던 길장 스님(吉藏, 549~623)도 자신의 시신을 짐승의 먹이로 버리도록 유언했다. ‘법화경’ ‘대품경’ ‘지도론’ ‘화엄경’ ‘유마경’ 등 대중들을 위해 늘 강의하고 수많은 저술을 펴냈던 스님은 백성들은 물론 왕과 공경대부들까지도 존경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동물에게 자신의 시신을 보시해달라는 마지막 당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길장 스님은 세상과 인연을 접기 전 ‘사불포론(死不怖論)’을 집필했다. 여기에서 스님은 죽음을 두려워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 윤회의 고리를 끊을 것을 당부하며 이렇게 써내려갔다.

“삶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은 실상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릇 죽음이란 삶으로 말미암아 찾아온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무슨 이유로 죽음이 있겠는가. 그렇기에 죽음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태어날 일을 비통해해야 한다.”

이처럼 시신을 보시한 사례가 꼭 중국불교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중세의 잇펜 스님(一遍, 1239~1289)도 자신의 시신을 동물에게 주도록 했다. 길 위의 성자라고 불리는 잇펜 스님은 신라의 원효대사가 그랬듯 평생 저잣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잇펜 스님은 생사가 없고 생멸이 없는 나무아미타불의 이치를 노래했다. 그저 명호를 외우면 누구나 극락왕생할 수 있으니 나무아미타불에 모두 내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환호했다. 처음 신기한 듯 구경하던 이들도 나중에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함께 춤을 추었다. 자연재해와 전쟁, 살인과 굶주림이 일상이 돼버린 속에서 이들에게 잇펜 스님의 노래는 환희로웠다. 현세의 삶이 고단하더라도 그 너머에는 차별도, 서러움도, 굶주림도, 죽음도 없는 세상이 있다는 것. 단지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만 열심히 부르면 서러운 인생의 고해를 건너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는 감로수 같은 법문이었다.

잇펜 스님은 1289년 8월23일 51세로 정토에 들었다. 스님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걷고 춤을 췄으며 염불의 공덕을 알렸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모든 저술을 모아 불태웠다. 그러고는 “일대(一代)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두 나무아미타불로 돌아간다”고 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나무아미타불 속에 있으며 나머지는 사족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내 교화는 내 일생에 있다”고 선언했다. 자기의 학문이나 법을 이을 생각 말고 그대들은 그대들의 삶을 살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이어 “내가 죽으면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들판에 내버려 짐승들에게 공양하도록 하라”고 부탁했다. 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지녔던 잇펜 스님의 마지막 보시였다.

조선시대 침굉 스님(枕肱, 1616~1684)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선사이면서 염불수행에도 정성을 다했던 스님은 숙종 10년(1684) 4월12일 순천 징광사에서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적멸에 들었다. 생전에 누구를 만나든 염불을 권했던 스님은 소나 돼지의 귀에 대고 염불하는 등 생명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억불의 시기에도 사대부들의 흠모를 받을 정도로 시(詩)와 문(文)에 뛰어났던 스님은 입적을 앞두고 그동안 썼던 글들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뒷사람들이 자신의 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공부를 해나가기를 바라서였다.

정작 곤혹스러운 것은 제자들이었다. 비록 글을 태웠더라도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시문을 모으면 유고집 만드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침굉 스님은 제자들이 이행하기 어려운 말을 남겼다. 자신을 다비하지 말고 반드시 날짐승들의 먹이로 주라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죽은 뒤에 내 몸을 태우려는 자가 있다면 나와 백대의 원수가 되리라. 바라건대 나의 이 작은 소망을 가엾게 여겨 물가나 숲속에 놓아두어 까마귀나 매가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하라. 부디 괴이하게 여기지 말고 나의 심정을 잘 살펴서 다비를 하지 말라.”

제자들은 이 난감한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했을까. 그 결과는 당대 선비 박사형(1635~1706)이 쓴 침굉 스님 행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자들은 스승의 육신을 다비하지 않았지만 들판에 버리지도 않았다. 인근 금화산 둘째 산봉우리 바위틈에 육신을 모시고 돌로 단단히 봉했다. 스승의 간곡한 유언을 등질 수도, 그렇다고 들판에 버릴 수도 없었던 제자들의 깊은 고뇌가 읽혀진다.

이재형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588호 / 2021년 6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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