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언어로 언어 부수는 전광석화 같은 선사들 기략

  • 불서
  • 입력 2021.06.14 10:28
  • 수정 2021.06.14 16:32
  • 호수 1589
  • 댓글 1

한권으로 읽는 벽암록
원오 극근 편저 / 혜원 역해 /  김영사
616쪽 / 2만3000원

30년 선학 연구 경험·안목으로
쉽고 정확한 ‘벽암록’ 해석 시도
벽암 정상 오르는 사다리 역할
법계도·선사들 소개 글도 수록

한권으로 읽는 벽암록
한권으로 읽는 벽암록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라는 찬사를 받으며 900여년간 수많은 납승들의 바랑 한 귀퉁이를 차지했던 선수행 교과서 ‘벽암록’. 이 책은 북송 때 선승인 원오극근(1063~1135) 스님이 편찬한 선종 제일의 공안집이다. 북송 초기 설두중현(980~ 1052) 스님이 당대(唐代) 선사들의 문답 중 100칙을 선별해 자신의 안목에서 송(시)으로 표현한 ‘설두송고’에 원오 스님이 촌평(착어)과 강설(평창)을 붙였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 ‘사교입선(捨敎入禪)’ 등 문자와 언어를 극도로 경계하는 선에서 ‘벽암록’은 늘 예외였다. 깨달음의 길을 걷는 선수행자들은 물론 고위관리와 사대부들까지 앞다퉈 찬탄했다.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는 간결함, 행간 곳곳에 번뜩이는 빼어난 통찰, 일체의 권위를 배격하는 거침없는 문장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신세계였다. 기라성 같은 선사들의 행리와 사상, 상대를 깨치게 하는 전광석화 같은 한마디는 파격 자체였고, 일상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언어로 언어를 부수고 대자유에 이르는 길이 그곳에 있었다.

‘설두송고’에서 본격화된 문자선은 ‘벽암록’을 거치며 정점에 이르렀다. 출가자는 물론 일반인에까지 선은 향상의 길이며 교양의 척도로 간주됐다. 문학, 예술, 조경, 건축을 비롯해 온갖 담론에서 선을 비켜갈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선의 시대였고, 그 대중화를 이끈 주역은 단연 ‘벽암록’이었다.

북송대 편찬된 ‘벽암록’은 남송,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읽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오늘날에도 ‘벽암록’을 제치고 선문에 들기는 어렵다.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는 이 책의 저력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쉬이 범접하기 어려운 설두·원오 스님의 깨침과 안목에서 비롯된다. 허나 보다 본질적인 것은 달마에서 시작돼 혜능, 남악, 마조, 백장 등 숱한 명안종사를 거치며 ‘무위진인’ 임제의현에 의해 정립된 임제선의 정수가 ‘벽암록’에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혜원 스님은 “본래 문자화될 수 없는 내용을 담은 선어록을, 그 의미를 손상하지 않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일은 현대 선종의 과제이고 사명”이라고 말한다.
혜원 스님은 “본래 문자화될 수 없는 내용을 담은 선어록을, 그 의미를 손상하지 않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일은 현대 선종의 과제이고 사명”이라고 말한다.

이는 원오 스님이 ‘벽암록’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세 가지 관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첫째,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은 미망(迷妄)이라는 것. 둘째, 결정적인 대오철저(大悟徹底)의 체험을 얻어야 하며 ‘있는 그대로가 부처’라고 말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라는 것. 셋째, 대오 체험을 얻기 위해서는 공안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버리고 의미와 논리를 끊는 한마디, 즉 활구(活句)로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벽암록’은 문자로 선을 드러냈지만 대오를 향한 결연한 실천적 의지를 역설하고 있다. 원오 스님의 제자인 대혜종고 스님이 간화선을 완성하는데 ‘벽암록’이 산파 역할을 했음은 자명하다.

‘벽암록’은 아름답고 웅숭깊지만 난해하기로도 정평이 나있다. 말을 넘어선 진리의 영역을 부득이 말로 보여줘야 하는 선문답 자체의 어려움에다 구성도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원오 스님의 여러 차례 강의 내용을 모았기에 내용이 중복되고 강의를 받아 적은 이의 의도까지 겹쳐 읽기가 쉽지 않다.

동국대 명예교수 혜원 스님이 역해에 착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학에서 30년간 선리를 연구하고 강의해온 스님은 ‘본래 문자화될 수 없는 내용을 담은 선어록을, 그 의미를 손상하지 않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일은 현대 선종의 과제이고 사명’이라고 여겼다. 스님은 전문 선학자의 오랜 연구와 식견을 바탕으로 학계에 권위 있는 선 문헌과 비교·분석을 통해 정확하고 객관적인 해석을 제공하고자 했다. 특히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선학을 전공한 여러 박사 연구자들과 심도 있는 토론으로 주관적 감상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최대한 높였다. 낯선 전문용어를 쉽게 풀이하고, 빈번히 등장하는 당송대의 속어도 자연스레 이해될 수 있도록 했다. 본문 뒤쪽에 중국 선종사의 흐름을 정리하고, ‘벽암록’에 나오는 법계도 및 주요 선사들의 간략한 소개 글도 싣고 있다.

선사들의 활발발한 기략(機略)과 활인검이 펼쳐지는 선의 세계. 그곳은 가파르고 험난한 천길 벽암을 올라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절경이다. 정통 선학자의 경험과 혜안으로 엮어낸 이 책은 우리를 그 벽암의 정상으로 이끌어줄 든든한 사다리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89호 / 2021년 6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