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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선종화가 김선두 : 평상심시도를 그리다

기자명 주수완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는 선(禪)의 세계

불교회화의 전통적 주제 드러나지 않지만 불교적 개념 담겨있어
반 쪼개진 ‘마른 도미’는 물아일체 경지로 깨우침 얻은 존재 같아
구불구불한 길도 단순한 물리적 길 아닌 깨달음으로 나가는 길

1)‘마른 도미’, 장지에 먹, 분채. 178×158㎝, 2019.
1)‘마른 도미’, 장지에 먹, 분채. 178×158㎝, 2019.

동양화가 김선두 화백은 2002년 가나아트에서 열렸던 근현대불교미술전에도 참여했고, 2020년 불교미술인협회 창립전에도 출품하는 등 불교예술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곧바로 불교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보통 ‘불교미술’이라면 부처나 보살, 아니면 나한 등이 묘사되기 마련이지만, 그의 그림 속에는 이런 불교회화의 전통적인 주제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본인의 작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깨달음’ 등 불교적 개념을 표현한 것임을 적극적으로 언급한다. 실제로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작품 안에서 직관적으로 선(禪)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마른 도미’를 보면 우선 한 마리의 말린 생선 그림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누구나 이 앞에서 왠지 모를 충격을 받게 된다. 말린 생선이 반으로 쪼개진 모습이 일견 처참해서일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적나라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반으로 갈라져 있으니 충격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이 도미 그림에서 어떤 고통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도미가 충격을 받은 관람자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더 충격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기를 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오히려 내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는 줄거리의 영화를 보는 듯, 내가 관람자가 아니라 실은 저 도미가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 반전의 묘미가 더 충격인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잘 것 없는 말린 생선 한 마리를 이렇게 크게 확대해서 그려놓고 보니 온 몸이 그물처럼 보인다. 마치 자신을 잡은 그물과 하나가 되어버린 듯한 도미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루어 경계를 허물고 그 스스로 깨우침을 얻은 존재처럼 그려졌다.

이 도미 그림이 불교회화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면 한번 일본 에도시대의 화가 나가사와 로세츠(長沢蘆雪)의 작품 ‘민달팽이(なめくじ)’를 보자. 민달팽이가 움직인 궤적을 선으로 자유분방하게 묘사한 이 그림을 보면 선(線)이 곧 선(禪)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나가사와 로세츠의 이 그림 역시 불교회화의 범주에 넣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가 불교적 소재의 그림을 많이 그렸던 것을 참조해보면(그가 그린 ‘열반도’ 1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꼭 직접적으로 불교적 주제를 드러낸 그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바탕에 선불교가 자리잡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서 선종화로 유명한 송나라 때의 목계(牧谿), 양해(梁楷) 등도 학이나 원숭이 같은 동물을 묘하게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특유의 해석으로 마치 선종의 화두를 보는 것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달팽이가 아니라 달팽이의 궤적을 통해 오히려 달팽이의 존재를 규명하는 역설의 화법이야말로 선종화의 특징이 아닐까. 김선두의 작품은 이러한 오랜 선종화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눈길’, 장지에 먹, 분채. 65×94㎝, 2019.(왼쪽)/ 일본화가 나가사와 로세츠의 ‘민달팽이’.(오른쪽)
‘눈길’, 장지에 먹, 분채. 65×94㎝, 2019.(왼쪽)/ 일본화가 나가사와 로세츠의 ‘민달팽이’.(오른쪽)

마침 나가사와의 민달팽이 그림의 현대적인 버전이라 할 만한 그림도 발견된다. 민달팽이의 궤적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이 꼭 민달팽이의 흔적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김선두의 ‘눈길’ 속에 보이는 산길의 구불구불한 흔적도 역시 그 달팽이의 궤적과 통하는 개념이다. ‘눈길’ 속의 길은 길이라서 사람이 걷는 것인지, 아니면 걸었기 때문에 길이 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걸어갈 것이기 때문에 길이 되는 것인지를 화두처럼 던져준다. 이 길이 화가에게 있어 단순한 물리적 길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임은 누구나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라는 존재 역시 그렇게 걸어온 길로 기억되고 존재지워진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눈길’이 깨달음으로의 과정이라면 ‘별을 보여드립니다’ 시리즈는 깨달음을 얻은 후의 시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선두 화백은 2013년에도 ‘작가와 화가가 함께 하는 신실크로드 기행’이란 기획을 통해 실크로드 탐사를 진행하며 당시의 인상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중에서 ‘혜초의 길’에서도 이와 유사한 화풍을 볼 수 있었다.
 

‘별을 보여드립니다-호박’, 장지에 먹, 분채. 138×178㎝, 2019.
‘별을 보여드립니다-호박’, 장지에 먹, 분채. 138×178㎝, 2019.

별은 종종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런 깨달음들이 가득한 그의 작품 속 밤하늘은 천불도의 우주적 해석처럼 다가온다. 사실상 밤하늘은 별이 아무리 많아도 대낮처럼 밝지 않지만, 작품 속 밤은 이러한 별들이 모여 대낮처럼 밝아졌다. 자연광 아래서 보는 것이 그저 ‘보는(see)’ 것이라면 별빛 모임으로 바라보는 것은 깨달음의 시각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look)’하는 개념에 비유할 수 있다. 별빛 아래 얽히고 설킨 그물과 잡동사니와 넝쿨은 우리 삶의 복잡한 인연과 업보의 세계를 보여준다. ‘혜초의 길’에서는 같은 밤하늘 아래 사막의 이야기가 비춰졌다면, 같은 하늘 아래 ‘별을 보여드립니다’에서는 우리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청정한 열사의 사막에도, 인간이 어지럽혀 놓은 도심 한복판에도 불타의 가르침은 저 밤하늘처럼 변함이 없다. 

마치 화두 같다. 누군가 고승에게 찾아와 “깨달음을 보여주십시오”라고 하니 고승이 “밤하늘의 저것들은 다 뭣꼬?”라고 하는 선문답이라 보면 어떨까. 깨달음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저렇게 밤하늘의 별처럼 누구에게나 떠있는데 굳이 다른 데서 진리를 찾지 말라는 ‘평상심시도’처럼 다가온다.

이처럼 선종화는 마치 옛 선사들이 스스로 불상마저 쪼개 장작으로 썼던 것처럼 부처나 보살이 등장하지 않아도 불교적일 수 있다. 때로는 그 점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져서 추상미술의 한 부분을 무리하게 불교와 연관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창작의도에서 불교적인 의도를 지녔다면 선종화로서의 범주에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선종에 있어서 ‘불립문자’의 개념이야말로 미술에서 형태를 벗어난 추상미술 이론의 선구가 아닐까?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89호 / 2021년 6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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