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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새벽예불

기자명 이제열

깊은 울림·조화로움 감동으로 전달

새벽 목탁소리 맞춘 예불 소리
마음 정화되고 번잡함 사라져
중생, 소리 따라 윤회한다지만
소리 통해 윤회서 벗어날 수도

모든 종교에는 의식(儀式)이 있고, 거기에는 엄숙함과 경건함이 깃들어 있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지만 다양한 의식이 행해진다. 그 중 새벽예불을 가장 경건한 의식으로 꼽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깊이 잠든 이른 새벽, 가사를 걸친 스님들이 부처님께 정성껏 예불 드리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숙연해진다.

새벽예불은 보여지는 모습뿐 아니라 소리도 매우 장중하고 청아하다. 한글의식이 많이 확산됐다지만 음률과 무게감 때문인지 여전히 한문의식도 많이 행해진다. 특히 새벽예불은 내용을 잘 모르더라도 음률을 듣는 것만으로 감동이 일어난다. 중생들의 번뇌는 반드시 선정을 닦아야만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리를 통해서도 마음이 정화되고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집전하는 스님의 목탁소리와 음률에 맞추어 법당 안의 대중들이 다 함께 예불을 올리노라면 세속의 번잡함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깊은 감동에 젖어든다.

예불의식에는 일반수행에서 발견할 수 없는 여러 공덕과 이익들이 있다. 성스러움, 청정, 신심, 공경, 참회, 감사, 정성, 간구, 발원 등이 그것이다. 만일 예불의식 때 정갈하고 조화로운 음성을 내지 못하거나 속으로만 웅얼거린다면 감동과 공덕도 크게 반감될 수밖에 없다. 또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예불문을 봉송하더라도 목소리가 거칠거나 음률이 제각각이라면 동참 대중들의 마음도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새벽예불의 특징 중 하나는 불단에 깨끗한 물을 올린다는 점이다. 반면 저녁예불에는 향을 올린다. 새벽예불 때 공양하는 것은 물이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차가 된다. 그렇기에 새벽예불의 첫 문단은 차를 중심으로 한 헌다 게송으로, 저녁예불에는 향을 중심으로 한 헌향송으로 시작한다. 새벽예불의 다게송은 ‘아금청정수(我今淸淨水) 변위감로다(變爲甘露茶) 봉헌삼보전(奉獻三寶前) 원수애납수(願垂哀納受, 3회 반복)’이다. 해석하면 ‘제가 지금 이 깨끗한 물을 감로수로 변화시켜 삼보전에 바치오니 원하옵건데 어여삐 받으소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감로란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슬을 뜻한다. 본래 감로는 도리천에 내리는 이슬로 이것을 마시면 죽지 않는다고 한다. 불법을 감로법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부처님 가르침이 중생들을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에 그렇다. 비록 도리천의 이슬이 아니라도 삼보전에 올린 물이 감로다가 되어 예불을 올리는 이들도 부처님처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불의 대상은 불·법·승 삼보이다. 예불문에서는 그 삼보를 일곱으로 나열해 칠정례를 올린다. 본사 석가모니부처님, 법계에 항상 머물러 계신 모든 부처님들, 일체의 한량없는 가르침, 사대보살들, 십대제자를 비롯한 모든 아라한, 역대 조사들과 천하의 종사들, 법계에 가득한 참된 모임(승가)이다.

그런데 물 한 그릇을 가지고 어떻게 그 많은 성현들을 공양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물 한 그릇을 한량없이 많은 성현들이 나누어 드실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답은 이렇다. 대승불교에서는 중생들이 올린 모든 공양은 양과 관계없이 삼보의 위신력으로 변화돼 모든 성현이 드시고서도 그대로 남아있다. 삼보에게 바친 한 그릇의 물이 한량없이 많은 물이 되어 모든 성현들이 능히 공양하시고도 그 물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물은 중생이 올린 세속의 물이지만 불단에 올리면 법의 물이 되어 모든 성현들과 더불어 법계에 상주하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찌 이것이 물뿐이겠는가? 중생이 바친 모든 공양과 마음 또한 그렇다. 중생이 바친 보잘것없는 공양과 신심도 삼보에 이르면 법계에 상주해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없어지지 않고 모든 성현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 이렇듯 새벽예불에 깊은 뜻이 담겨 있기에 불교의 어떤 의식이나 수행법 못지않게 수승하다고 할 수 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눈을 비비고 올리는 예불소리는 목소리와 마음 모두 정갈하고 조화로우며 정성스러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나라 영명연수 선사는 중생은 소리를 따라 윤회한다고 했지만 동시에 중생은 소리를 통해 윤회를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590호 / 2021년 6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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