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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⑪ (4) ‘중대불교’의 사상적 배경 - 하

행정관서와 유교교육기관 설립되며 불교·유교 구분 명확해져

신라는 고구려·백제에 비해서 
300년 늦게 유교 교육 시작돼

중국화 된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서 유교사상 함께 들어와
관료채용에 있어 유교식 시험 
기준 적용돼나 골품제로 한계  

임신서기석(보물). 제작 연대는 진흥왕 13년(552) 임신설, 진평왕 34년(612) 임신설, 성덕왕 31년(732) 임신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된다. 중국 한문과 다르게 우리말식으로 되어 있는 소박한 문체이면서 이두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삼국통일 이전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임신서기석(보물). 제작 연대는 진흥왕 13년(552) 임신설, 진평왕 34년(612) 임신설, 성덕왕 31년(732) 임신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된다. 중국 한문과 다르게 우리말식으로 되어 있는 소박한 문체이면서 이두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삼국통일 이전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전후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새로운 운영원리로서 유교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료의 인사를 담당하는 중앙행정관서인 위화부의 조직을 강화하여 1급관서로서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관료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를 교육하게 됨으로서 유학자나 문장가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인들이 배출되어 ‘중고’ 시기 불교승려들이 전담하여 왔던 지식인의 역할을 분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교는 불교와 구분되어 독립된 사상으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교육기관 설치와 유교경전 교육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면 실로 300여년이나 뒤늦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동아시아문화권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인 한자가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를 특정하기란 어렵지만, 철기문화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고조선 말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이주민 유입, 중국 왕조와 교류를 통하여 한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어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의 시기에는 제한된 지역에서나마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음은 현존하는 ‘점제현 신사비(秥蟬縣 神祠碑)’, 그리고 동기・칠기・인장・봉니(封泥)・와전(瓦塼) 등의 명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자가 널리 사용된 것은 고구려와 백제에서였으며, 신라는 가장 뒤늦었다. 중국의 한사군을 축출하면서 성장한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2년(372) 중앙에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한자와 유교를 교육하였으며, 지방 각처의 경당(扃堂)에서도 결혼 전의 미성년자들을 모아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오경(五經)과 같은 유교경전, ‘사기’ ‘한서’ 등의 역사서, ‘옥편(玉篇)’ 등의 사전, ‘문선(文選)’ 같은 문학서를 읽고 있었으며, 자국의 역사서로서 국초의 ‘유기(留記)’ 100권, 영양왕 11년(600) 이문진이 ‘유기’를 개편한 ‘신집(新集)’ 5권 등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일찍부터 순수한 한문의 문장을 짓기도 하였는데, 한대의 예서(隸書)로 새긴 ‘광개토대왕비’(장수왕 3년, 414)를 남겼다. 

낙랑군과 대방군의 주민을 흡수하면서 발전한 백제에서는 이미 박사의 제도가 있었으므로 유교 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經)・사(史)・자(子) 등의 한문서적도 있었다고 하며, 역사서로서 근초고왕대(346〜375)에 고흥이 ‘서기(書記)’를 편찬하였다. 백제는 개로왕 18년(472) 고구려의 침공을 호소하는 표문을 북위에 보냈는데, 그 글은 조선초기 편찬된 ‘동문선’에 실릴 정도의 명문장으로 평가되었다.

신라는 한자나 유교의 전래가 고구려와 백제보다 상당히 뒤늦어져서 5세기말 6세기 초에 와서야 비로소 문자생활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중국 왕조에 최초로 사신을 파견한 것은 17대 나물마립간 26년(381)이었는데, 고구려의 사절을 따라 북조인 전진에 위두(衛頭)를 사신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과의 교류는 오랫동안 두절되었다가 두번째로 법흥왕 8년(521)에 남조인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때도 백제의 사신을 따라가야 할 정도로 독자적으로 교류할 능력이 없었다. ‘양서(梁書)’에서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새겨서 통신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아서 당시까지도 한자가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대 눌지마립간대(417~458)부터는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고 있었고, 22대 지증왕대(500~514)는 중국식의 ‘왕’을 칭하였던 것을 보아 한자도 받아들여졌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신라인이 남긴 최초의 금석문으로는 지증왕 4년(503)의 영일의 ‘냉수리비’ 그리고 법흥왕 11년(524)의 울진의 ‘봉평비’ 등인데 그 내용은 재산 분쟁이나 실화(失火) 사건을 6부의 대표들이 회의를 통하여 해결하고, 그 사실을 돌에 새긴 일종의 공문서 같은 것이었다. 

그 뒤 법흥왕 14년(527) 불교를 공인하고, 23년(536)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칭하게 될 때에는 울주의 천전리 계곡을 찾고, 그것을 기념하는 내용의 명문들을 남길 정도로 왕실과 귀족들은 문자생활을 즐기고 있었으며, 다음 24대 진흥왕 6년(545)에는 거칠부에 의해 국왕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국사(國史)’를 편찬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진흥왕대(540~576)에는 다양한 비석들이 새겨졌는데, 특히 진흥왕 29년(568)에 수립한 ‘진흥왕순수비’에서는 유려한 문체로 ‘서경’과 ‘논어’ 같은 유교경전에 의거하여 왕도사상(王道思想)을 표방하고 있었다. 과거 족장들이 가져오던 선민사상(選民思想)이 퇴색되고, 제왕의 ‘덕(德)’을 내세우는 반면 신민에게는 ‘충(忠)’을 요구하는 유교적 정치사상을 주장한 것이다. 신라는 한자와 유교가 고구려와 백제보다는 뒤늦었으나, 진흥왕대부터는 유교 윤리가 권장되고 있었다. 

특히 청소년집단인 화랑도에서 가장 중시되던 윤리덕목인 ‘충(忠)’을 통하여 위로 왕권의 강화를 뒷받침하고, ‘신(信)’을 통하여 옆으로 사회적인 결합을 이루고, ‘용(勇)’을 통하여 대외적 위기를 타개하는 시대정신으로 부각되었다. 청소년들에 의한 충・신・용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대표 인물로서는 진흥왕 23년(562) 대가야전에 출전한 사다함(斯多含)과 진평왕 24년(602) 대백제전에 출전한 귀산(貴山)・추항(箒項)을 들 수 있다. 특히 사다함은 이름이 불교의 4과(果)의 하나인 것으로 보아 불교신자인 것을 알 수 있고, 귀산과 추항은 불교승려인 원광으로부터 평생 지킬 계로서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았던 사실을 보아 이러한 윤리덕목은 불교의 영향으로 성립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랑도에 승려낭도가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당시인들에게 유교와 불교는 구분없이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유교는 불교를 통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원래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였으나, 중국에서 수용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로 중국적으로 변용되었으며, 특히 한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중국적인 사유가 혼합되었기 때문에 신라에 수입된 불교 자체가 유교사상을 상당히 내포하고 있었던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초기에는 시대정신으로 부각된 윤리덕목은 유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불교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교를 비롯한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하고, 국가 행정관서를 크게 정비한 26대 진평왕대(579~632)에는 유교에 대한 이해도 상당히 진전되어 ‘임신서기석’에 보이는 바와 같이 맹우관계인 두 청년이 ‘시경’ ‘서경’ ‘예기’ ‘춘추’ 등 유교의 경전을 스스로 공부하여 ‘충도(忠道)’라는 새로운 사회윤리를 모색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진평왕대에 병부령 김후직(金后稷)은 ‘서경’이나 노자의 글을 인용하여 진평왕의 지나친 사냥 행위를 간하고 있는데, 그의 이름 자체가 순(舜)임금 때의 관직 이름이나 주 무왕의 15대 조상인 기(棄)의 이름에서 취한 것임을 아울러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진평왕대의 눌최(訥催), 선덕여왕대의 죽죽(竹竹), 태종무열왕대의 반굴(盤屈)과 신문왕대의 영윤(令胤) 부자 등은 전쟁에 임하면서 ‘논어’나 ‘예기’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삼국통일 전쟁에서 외교문서 작성 등 문장가로서 크게 활약한 강수(强首)가 젊은 시절에 불교를 세외교(世外敎)라 비판하고 유교를 선택하여 ‘곡례’와 ‘효경’을 읽었다는 사실은 이제 유교가 불교와 구분되어 독립된 학문으로 이해하는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나타내준다.

그런데 신라의 유교에 대한 이해가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당 태종의 유교・불교・도교 3교 정립 정책과 중화주의적 세계정책은 신라 유교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태종은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여 정치 영역은 유교, 종교 영역은 불교와 도교가 담당케 했으며, 불교와 도교의 관계는 노자의 성이 당황실의 이씨(李氏)와 같다고 해 도교를 불교의 상위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인도 구법여행에서 16년 만에 귀국한 현장의 경전번역 사업을 지원해 불교도 크게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특히 정치사상으로는 유교를 관학(官學)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정관14년(640)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공영달(孔穎達)을 위시한 교수들에게 칙명을 내려 공동작업을 통해 다양한 유가의 경전 가운데서 표준적인 텍스트와 그에 대한 표준적인 주석을 선정한 다음, 그 주석을 보충하는 소(疏)를 지어서 ‘오경정의(五經正意)’라고 하는 총서를 편찬케 하였다. 

유학의 여러 갈래에 대한 정리를 통해 한 무제의 사상통일 정책에 이어 다시 한번 학문과 사상의 통일을 기하였다는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그리고 당 태종은 이러한 사상정책을 주위의 이민족들에게도 관철시키려는 중화주의적인 세계정책의 일환으로 고구려・백제・신라・고창(高昌)・토번(吐藩) 등 주위 여러 나라의 자제들을 국자감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과거시험도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빈공과(賓貢科)를 설치함으로서 중국의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신라에서 당의 유학을 직접 받아들이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진덕여왕 2년(648) 신라의 대외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김춘추가 당에 사신으로 간 것이었다. 김춘추는 당태종을 면대하여 나당군사협정을 체결하기 전후에 국자감을 찾아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고, 중국의 의복제도에 따를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귀국한 뒤 당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과감한 정치와 문화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가운데 진덕여왕 5년(651) 집사부 등 중앙행정관서의 정비와 함께 국학(國學)의 대사(大舍) 2인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국학이 정식 발족된 것은 장관직인 경(卿)이 설치된 신문왕 2년(682)이었다. 국학에서는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하고, 5경과 ‘문선’을 3과의 선택과목으로 하였다. 그뒤 성덕왕 16년(717)에는 당으로부터 공자・10철(哲)・72제자의 화상을 가져다 국학에 안치하였다. 이어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감으로 개칭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더욱 강화하였다. 그리고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고 하는 관리채용을 위한 일종의 국가시험제도를 설치하였는데, 분우지직(分憂之職)이라는 지방의 수령은 독서삼품과, 곧 문적(文籍) 출신으로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독서삼품과는 일종의 과거시험 제도로서 관리 채용의 기준을 골품제의 신분보다는 유교적인 지식의 성적에 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험에 합격할지라도 관직의 진출에는 골품에 따른 차등과 한계가 있었으므로 유교가 당에서와 같은 관학의 역할을 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처음에는 불교를 매개로 하여 성장하기 시작한 신라의 유교에 대한 이해는 다음 단계인 통일기에 들어와서 전문교육기관인 국학과 관리채용시험인 독서삼품과의 설치를 통하여 그 이해의 수준과 범위를 넓혔으나, 사회조직원리로서의 골품제도의 뿌리가 워낙 깊었기 때문에 끝까지 새로운 사회편제원리로서 유교를 이해하기는 어려웠고, 또 적용할 수도 없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91호 / 2021년 6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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