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 동물들도 감동한 죽음

스님이 열반에 드니 거위·개·호랑이·새들이 목 놓아 울부짖었다

6년간 혜원 스님 법문 듣던 거위, 입적 20일 전부터 슬피 울어
신조 스님 따르던 개는 스님 죽자 내내 눈물 흘리며 죽음 맞아
깊은 산중서 살던 담순 스님 입적 땐 호랑이 등 산짐승들 애도

2600여년 전,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히말라야산맥과 타클라마칸·고비사막을 건너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불살생 차원을 넘어 동물들을 적극 보호하고 이들을 살리려는 방생으로 나아갔다. 고승들의 출가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물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신라 자장 스님은 사냥으로 잡은 꿩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었고, 7세기 혜통 스님은 자신이 잡아먹은 수달이 뼈가 되어서도 새끼들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고 출가했다. 통일신라 율사 진표 스님도 사냥하던 중 버드나무에 꿰어놓았던 개구리가 다음 해에까지 살아남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출가했다고 전해진다. 고승들의 출가인연에 유독 동물들의 고통과 죽음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연민이 곧 발심의 근간임을 시사한다. 나약한 존재에 대한 자비심이 있어야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으며, 불교의 궁극적 이상인 성불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고승과 동물과의 친연성은 죽음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6세기 북주(北周)의 무제가 혹독한 불교말살 정책을 펼 때 그 면전에서 “폐하는 지금 힘만 믿고 삼보(三寶)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비지옥은 귀천을 가리지 않거늘 폐하는 반드시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이오”라고 일갈했던 정영사(淨影寺) 혜원(慧遠, 523~592) 스님. 거대한 체구에 뛰어난 학승이면서 기개가 넘쳤던 혜원 스님은 뜻밖에도 거위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속고승전’에 따르면 혜원 스님은 정영사로 옮기기 전 청화사(淸化寺)에 머물렀다. 이때 절에서 키우던 거위가 혜원 스님의 강론을 듣는 것을 좋아해 모두들 신기하게 여겼다. 몇 해 뒤 혜원 스님이 정영사로 떠나자 거위는 밤낮으로 슬피 울어댔다. 이를 안타까워한 청화사 스님이 거위를 정영사로 데려가 일주문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거위는 어떻게 알았는지 혜원 스님의 방으로 곧장 뛰어가더니 반갑다는 듯 푸드덕거렸다. 거위는 혜원 스님의 강론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으레 강당으로 향했고 법문이 끝날 때까지 다소곳이 앉아 경청했다. 다만 혜원 스님이 강론할 때 얘기가 다른 곳으로 흐를 때면 소리를 내고 강당 밖으로 날아가고는 했다.

6년간 스님의 법문을 빠짐없이 듣던 거위가 하루는 절 마당을 오가며 슬피 울어댔다. 종소리가 들려도 더 이상 강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날 강당 위의 대들보도 까닭 없이 무너져 내렸다. 592년 6월4일의 일이었다. 혜원 스님의 병세가 깊어진 것은 이때부터다. 시름시름 앓던 스님은 그해 6월24일 새벽녘 눈을 뜨고는 지금 몇 시인지 물었다. 묘시(오전 5시30분~6시30분)쯤 됐다는 주위의 말에 “지금 차가운 기운이 배꼽에 이르렀다. 죽음과 거리가 두세 치밖에 남지 않았다”며 침상을 치우도록 했다. 그러고는 스스로 발을 포개 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뒤 생을 마쳤다. 속가 나이로 70세였고 법랍은 50년이었다. 거위가 종일 구슬피 울기 시작한 지 꼭 20일째였다. 이날 거위도 그토록 흠모하며 따랐던 일생의 스승을 잃고 말았다.

수·당대 고승인 신조(神照) 스님의 생애에는 개가 등장한다. 전란의 시대를 살았던 스님의 어린 시절은 신산했다. 9살 때 수나라가 혼란에 휩싸이면서 가족들은 죽고 흩어져 어머니와 단둘이 남아 근근이 목숨을 연명해나갔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하루아침에 천애의 고아가 됐다. 갈 곳도 돌봐줄 이도 없었다. 아침에는 나무열매를 구해 먹고 밤에는 시체가 있는 막에서 잠을 잤다. 사람들은 그런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했지만 제 코가 석자인지라 선뜻 돕겠다는 이는 없었다.

그는 12살 때 위씨사(尉氏寺)의 율사 명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율장을 배우려는 스님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고 어린 신조 스님은 식량을 구하는 일을 맡았다. 마을 곳곳을 다니며 탁발했고 그것으로 대중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렸다. 스님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틈틈이 ‘승만경’과 ‘법화경’을 읽고 외웠다. 6년 뒤 정식 승려로 인정받는 절차인 구족계를 받고 계율학 강론을 듣게 되면서 대중은 신조 스님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다. 다른 이들은 생각도 못한 기발하거나 깊이가 다른 견해를 자주 밝히다 보니 곧바로 주목받았다. 스님은 계율 공부를 마친 뒤 위씨사를 떠나 저명한 학승들을 찾아다니며 ‘섭대승론’ ‘열반경’ ‘화엄경’ ‘성실론’ 등을 공부했고 그들로부터 크게 인정받았다.

이후 신조 스님에게 강론을 요청하는 일이 잇따랐고 스님은 한 번도 사양하지 않았다. 또 누구를 만나든 자비심으로 대했으며, 수백 구의 불상을 조성하고 수천 권의 경전을 사경해 이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보시했다.

스님의 인자함과 계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청정한 행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주목을 더 받았던 데에는 개의 존재도 톡톡히 한몫했다. 그 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늘 스님을 따라 다녔다. 스님이 거둬 키운 불쌍한 개일 수 있었다. 그 개는 매우 영특했고 한시도 스님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신조 스님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였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개는 스님이 출가한 본사를 향해 밤새도록 달려갔다. 족히 80km는 됨직한 먼 거리였다. 그 절에 가면 스님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절에 도착한 개는 주위를 돌며 처절하게 울부짖고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본사 스님들은 그 개가 신조 스님과 같이 다니는 줄 알았기에 스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걱정스러웠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얼마 후 지계와 수행, 강론과 포교에 전념하던 스님이 세속 나이 59세로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님들은 비로소 개가 며칠 동안 보인 기이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스님이 입적하면 매장하는 일이 많았다. 그 개는 신조 스님이 묻힌 곳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물만 흘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록돼 있다.

동물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에도 그들은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두려움을 내려놓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조선시대 윤두서(1675~1720)가 그린 노승도(老僧圖).
동물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에도 그들은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두려움을 내려놓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조선시대 윤두서(1675~1720)가 그린 노승도(老僧圖).

수나라의 담천(曇遷) 스님도 개와 인연이 깊었다. 교학의 대가로 섭론종의 북방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담천 스님은 논리가 정연했고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잘 드러냈다. 당대 최고의 교학자라는 정영사 혜원 스님조차 “담천선사는 고정관념을 깨뜨려 진리에 들어가는 것이 나보다 낫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담천 선사는 황제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그럼에도 평생 자신을 낮추며 살았던 스님은 천성이 인자해 탐내고 다투는 일이 없었다. 제왕이 희사한 물건이나 멀고 가까운 곳에서 보내온 어떤 선물이라도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승단에 회향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앞장서 도왔으며 불도를 펼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허나 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중풍이 악화됐고 607년 12월6일 세납 66세로 세상과의 연을 접었다.

이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어디 있다가 나타났는지 흰 개 한 마리가 스님을 추모하는 빈소로 달려왔다. 모두들 깜짝 놀라 개를 제지했지만 끝내 떠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스님 생전에 그 개와 어떤 인연이 있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개는 문상 온 사람들이 곡(哭)을 하면 자기도 소리 내 울부짖었으며, 그들이 곡을 그치면 개도 울음을 그쳤다. 먹을 것을 주어도 먹지 않았고 늘 빈소 오른편을 꼼짝 않고 지켰다.

문도들이 스님의 시신을 종남산 북쪽 기슭에 묻기 위해 운구를 옮길 때였다. 영구 행렬이 출발하자 개는 시신을 지키기나 하려는 듯 앞뒤를 분주히 오가며 살폈다. 마침내 영구 행렬이 장지에 도착하고 하관(下棺)까지 모두 마무리했다. 그런데 갑자기 개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 개가 스님과 어떤 관계였는지 궁금했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다만 스님의 지극한 자비심이 인연이 되어 벌어진 일이며 그 개는 스님을 보호하려는 영물이라 여겼다.

수나라 백천산사 담순(曇詢) 스님은 동물들과 가장 많이 교감하고 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은 고승이다. 백첨산 깊은 곳에 터를 마련해 정진하던 스님은 동물들에게 늘 자비의 마음을 보냈고 사슴, 노루, 새들도 점차 경계를 풀고 스님을 대했다.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움을 그치지 않자 스님은 석장(錫杖)으로 둘을 떼어놓고 몸으로 가로막으며 일렀다. “함께 숲속에 살아도 크게 어긋날 일이 없을 터이니 각자 길을 나누어 지내면 되지 않겠냐”고 타일렀다. 그러자 호랑이가 알아들었는지 싸움을 그치고 흩어졌다. 곰과 호랑이 싸우는 모습을 봤을 때에도 이들을 중재해 싸움을 그치도록 했다. 스님은 산중에서 10년간 떠나지 않았고 스님이 홀로 선정에 들면 호랑이가 곁에서 이를 지켜주었다.

우연히 이 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산중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고 스님은 기꺼이 법을 베풀었다. 597년 스님이 세속나이 85세, 법랍 50세로 세상을 떠날 무렵 동물들이 종일 스님의 처소를 서성였고 어떤 새는 스님이 누워있는 자리에까지 와서 한참을 울다 날아갔다. 특히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는 이틀 밤을 슬피 울부짖다가 떠났다고 전한다.

스님이 동물을 돌보고 그들과 교감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당나라 지개(智凱) 스님은 당시 눕지 않고[長坐不臥] 절 밖을 나서지 않는[洞口不出] 것으로 유명했는데 버려진 개들을 데려오게 해 30~50마리를 늘 보살폈다. 잠사리(岑梨)라는 스님은 3000여권의 경전을 다 외울 정도로 뛰어났지만 낮에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밤에는 선정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먹을 것을 아껴 방안에 100여 마리의 쥐를 기르고 아픈 쥐가 있으면 정성껏 돌봐주었다. 고구려 승랑 스님의 뒤를 잇는 삼론학의 대가 법민(法敏) 스님이 만년에 정림사에서 법을 설할 때면 2m가량 되는 뱀이 천장에서 반쯤 모습을 드러내 스님의 머리 위에 머물며 경청했고 법문이 끝나면 비로소 숨어들어갔다고 한다. 당나라 홍업사 도경(道慶) 스님은 계행이 반듯하고 포교에 힘을 쏟았던 고승으로 626년 8월23일 61세로 세연을 마쳤다. 며칠 뒤 대중들이 스님을 산자락에 묻기 위해 땅을 파려는데 한 떼의 백학이 하늘에서 내려와 꼬리를 끌면서 시신을 갈무리할 땅을 누르며 슬피 울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던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 스님이 불법을 강론할 때도 도량마다 원숭이들이 찾아와 듣고 머리를 숙이고, 뱀이 찾아와 듣고는 허물을 벗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이 일반화됐지만 그것은 개와 고양이에 한정됐을 뿐, 대다수 동물들은 여전히 인간의 먹거리나 볼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물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에도 그들은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두려움을 내려놓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숫타니파타’의 “살아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여라”는 부처님 말씀은 뭇 생명을 찬탄한 불교의 위대한 선언이었다.

편집국장 mitra@beopbo.com

[1592호 / 2021년 7월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